종도사/설교문

하나님의 열심 (창세기 11장 1절-9절)

하엘파파 2025. 2. 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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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열심 (창세기 11장 1절-9절)

말씀본문 : 창세기 11장 1절-9절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말씀제목 : 하나님의 열심


​ 오늘 말씀은 여러분들이 잘알고계실 바벨탑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시작하기에 앞서 창세기의 전체 흐름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자 하는데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만물을 지으시고 난 뒤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그들에게 그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명령하셨어요.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죽이거나 없애지 아니하시고 이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시고 이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가인과 아벨이 나오게 되는데 이들은 또 어떻게 돼요?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죠. 또다시 인간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이 때도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다른 이들이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심으로써 보호와 은혜의 손길을 허락하시는거죠. 이후에 셋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계보를 다시 이어가게 되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또다시 죄에 빠져서 완전히 타락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홍수를 일으키셔서 싹 다 쓸어버리시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모든 것을 쓸어버리실 때에도 우리 지난 주에 배웠던 내용이죠.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로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계보를 또 이어가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다 쓸어버리시고 노아를 통해 다시 시작된 세상은 또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11장의 내용처럼 또다시 이들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창세기의 내용을 짚어봤을 때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저는 쭈욱 보면서 제가 하나님이라면 이것들은 진짜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것들이구나 하고선 그냥 다 없애버릴 것 같은 거예요. 너무 짜증나지 않겠습니까? 너무 질려버리게 하잖아요. 용서 해주면 또 죄를 짓고, 또 용서해줬더니 또 죄 짓고 있고. 너무 질릴 것 같은거죠.


 그런 생각이 드는 가운데서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까지 갈 필요도 없는거죠. 그냥 내 모습 자체가 하나님이 보실 때 너무 짜증나셨을 것 같은 거예요. 용서해줬더니 또 죄짓고 있고, 도와줬더니 또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고. 은혜를 누리면서도 자꾸 죄악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제가 하나님 앞에서 그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성격이었다면 저는 진작 사라졌을 것 같은 거예요. 제가 봐도 저는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실패작인거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끝없이 인내하시고, 참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사랑으로 안아주심으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 인생의 길을 바른 길로 인도해가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신 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노아 시대 때 홍수 사건 이후, 사람들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좋았을 것 같지 않으세요? 여러분 혹시 학교 수업에서 영어 수업 좋아하십니까? 전 진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영어를 비롯해서 이 외국어 수업 듣는 것이 너무 힘들었거든요. 특히 또 신학을 배우려면 히브리어, 헬라어, 독일어 이런 것들 배워야 한단 말예요.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에 너무 힘들어한단 말이죠. 이 바벨탑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일본어를 배우지 않아도, 중국어를 배우지 않아도 됐지 않았겠냐고요.

 

 하여튼 창세기를 보다보면 화가 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만 안따먹었어도 우리 데이트 나갈 때 옷 뭐 입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됐지 않았겠냐고요. 자다가 일어나서 그냥 나가면 되는거야. 뭘 걸칠 필요가 없는거죠. 코디 신경쓸 필요 없는 겁니다. 옷 못입는다는 소리 들을 일이 없다고요. 그리고 일도 안해도 돼요. 먹고 살 걱정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배고프면 그냥 아무 나무에서 열매 따서 먹으면 되는 거예요. 오늘은 어디 놀러가볼까 이 생각만 하는거죠. 일본을 가든, 중국을 가든, 유럽을 가든, 아메리카를 가든 그냥 전세계 놀러다니면서 전세계 사람들 만나도 그냥 한 언어로 물어보고 대답하면서 대화하는 그런 너무나 즐거운 삶을 살아갔을텐데 창세기 속 인간들이 다 망쳐놨다고요. 창세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죄만 안지었다면 우리도 얼마나 즐거운 삶을 살아갔겠습니까. 이렇게 죄라는 것은 우리를 더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힘들게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는 이러한 즐겁고, 재밌고, 아름다운 삶이 펼쳐질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오늘 말씀에 나오는 시대는 사람들이 한 언어를 사용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참 안타까운 것이 그 생각하는 것이 꼭 죄를 향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에요. 이들이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우리가 보통 바벨탑 사건이라고 말을 하는데, 사실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바벨 도시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시에 탑을 하나 높이 건설하려고 했던 것이죠.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됐겠습니까? 이들은 단순하게 도시를 건설할 생각이 아니었던 거예요. 4절에서 이들이 말한 내용 속에 세가지의 불순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 먼저 첫번째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이들은 지금 그 탑의 꼭대기를 어디에 닿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늘에 닿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의도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꼭대기에서 내려다보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참 나쁜 습성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탐욕'이 있다는 것입니다. 탐욕이란 무엇입니까? '내 것이 아닌 것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 이라는 거예요. 뭔가를 계속 갖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에도 이런 속담이 있잖아요. '남의 떡이 커보인다' 내 것과 남의 것을 보면 똑같은 크기여도 남의 것이 더 좋아보인다는 것입니다. 저게 더 좋아보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가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거잖아요.

 하나님께선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을 다 먹어도 된다고 하셨단 말이죠. 그 중에 딱 하나, 선악과만 먹지 말라고 하셨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아담과 하와는 그 선악과를 먹었냔 말입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하와가 뭐 선악과를 봤을 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해서 먹었을까요? 아닙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과일은 얼마든지 많았어요. 그런데 그 선악과를 먹었을 때 나에게 따라오는 효과가 그것을 다른 과일들보다도 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 효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3장 5절에서 뱀은 이렇게 하와를 꼬시는 것입니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 라는 말이 너무 선명하게 들린거죠.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바벨탑을 지으려는 이 인간들도 같은 생각을 한 거예요.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높은 곳에서 인간들을 다스리려 했던거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나가길 원하시는 것인데, 인간들은 하나님은 없이 인간들 스스로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두번째 불순한 생각은 "우리 이름을 내고" 구절을 볼 수가 있는데요, 이 말은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영광을 얻으려 했다는 거예요. 영광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분이심을 기억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이 영광을 취하려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고자 하면 안된다는 것이에요. 시편 147편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신다는 거예요. 그러나 지금 이들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이름을 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이러한 일들을 행하려 한다는거죠. "우리가 이런 건물을 만들었다!", "우리가 이 도시를 건설했다!" 를 드러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의 세상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유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 명성을 떨치기 위해 열심히들 살고 있지 않냐는 거예요. 내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내가 해낸 일들을 자랑하기 위해 열심히들 살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복음'이 되는 자들이 되어선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이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여주신다는 거예요. 내 생각과 내 능력으로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이뤄내가 내가 높아지려 하면 땅에 엎드러지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는 낮아지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이고, 나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더불어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 세번째로는 이들은 흩어짐을 면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단 말예요. 그런데 이들은 어떻게 하자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흩어짐을 면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머물자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반하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들의 뜻을 주장하며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늘에 닿게 하고,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반대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와 상관없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더 신뢰하겠다는 거예요.

 제가 딸을 키워보니 좀 더 확실하게 느끼는 것인데요, 자식이 부모에게 해서는 안될 말이 뭔지 아십니까?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준게 뭐가 있어!", "엄마 아빠는 없는게 더 낫겠어!" 라는 말입니다. 제 딸이 저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건 아니지만, 만약 제 딸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한다면 저는 아빠로서 너무 큰 상처와 아픔을 느끼게 될 것 같은거죠. 자식이 부모를 인정하지 않고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부모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자기 맘대로 살겠다고 하면 그것만큼 가슴이 찢어지는게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하기를 원하셨는데,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뒤로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뜻대로, 자신들의 생각대로 살면서 죄를 범하고 죄악 속에 물들여지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보시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데, 내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내 뜻을 세우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모습을 보실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냐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나아감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건설하려는 이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시려고 내려오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니까 쟤들 뭐하는건가 싶어서 직접 가까에서 보시려고 내려오셨단 말예요. 내려오셔서 딱 보니까 이것들이 되도않는 짓들을 하고 있는거죠. 얼마나 기가 차셨겠냐고요.


 가끔 만화같은 것들 보게 되면, 어린 꼬맹이 여자애가 엄마 화장하는 모습을 보고 그거 따라하겠다고 막 화장대에서 이것저것 집어서 이상한 화장을 하는 그런 장면들이 있잖아요. 엄마 흉내 내겠다고 맞지도 않는 엄마 옷 꺼내서 입고 다 어지러뜨리는 그런 모습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지금 딱 그 모습이지 않겠냐는 겁니다.

 6절에 보면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뭐 인간들이 하는 일들의 능력이 너무 대단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막지 못하겠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맘만 먹으면 물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실 수 있는 분이신데 뭐 인간들이 하는게 뭐가 무서우시겠어요. 여기서 말씀하신 내용은 '얘네 더이상 냅두면 안되겠다' 라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너 좀 맞아야겠다' 라는거라고요.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선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까?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는 겁니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서 더이상 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게, 되도 않는 짓들을 그만두게끔 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을 만든 목적은 이런 짓 하고 있으라고 만든게 아니야" 라고 하시면서 다시 지면에 흩어지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치게 됐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 장면들을 통해서 인간의 열심과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3절과 4절에서는 사람의 열심의 모습이 나타나죠. "자, 벽돌을 만들자!",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자!" 죄악된 일에 열심을 내고 있단 말예요. 이러한 인간들의 열심에 하나님은 어떠한 열심을 나타내십니까? 7절에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고 있는거죠. "자, 내려가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이제 더이상 헛된 짓들 못하게 하자!" 이것이 사람의 열심과, 하나님의 열심의 모습의 차이입니다.

​ 우리가 때때로 삶을 살아가면서 죄악된 일들에 열심을 낼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일들에 열심을 낼 때가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나아가는 것에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열심을 낼 때가 있다고요. 그런데 참 감사한 것은, 우리가 그렇게 잘못된 열심을 나타낼 때에 하나님은 그것을 되돌이키기 위한 열심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일들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대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도 열심을 내신다는거죠. 우리가 그렇게 죄악 속에서, 죄 가운데서, 잘못된 일들 속에서 구르고 쓰러지고 넘어져있게끔 그냥 놔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잘못된 길을 다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그 잘못된 방향을 다시 잡아주시기 위해서, 그 잘못 간 곳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오늘도,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위해 열심을 내고 계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무조건은 아니겠지만,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내가 계획한대로, 내가 생각한대로 뭔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혼잡해지기만 할 때, 내가 세상적인 생각으로 했던 계획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세상적인 잘못된 생각과 계획을 혼잡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나의 생각과 나의 계획을 다시금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아니라면, 그 발걸음을 다시 되돌이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방향으로 다시 잡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런 분이시라고요. 직접 내려오셔서 직접 보시고 직접 일들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직접 오셔서 아담을 찾으시고 그 수치를 가려주시는 것입니다. 가인이 살인했을 때 직접 오셔서 보시고 그 죄를 알게 하시고 표를 주시는 거예요. 물로 쓸어버리시려 할 때에 직접 방주의 문을 닫으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안되겠다고, 실패작이라고, 다 없애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들을 고치시고, 또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다시 참으시고, 또다시 덮으시고, 또다시 안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세상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변화를 일으키시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들을 해나가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직접 다 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동행하며 그들의 손을 통해 이뤄가시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겁니다. 왜요?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저희 딸이 카페에 와서 아빠를 도와주겠다고 막 주방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럼 아빠는 비커에 우유를 얼마를 넣고 뭐를 얼마를 넣고 하면서 레시피를 알려주고 그것들을 도와주거든요. 그 아이가 하는 일들이 저에게 도움이 될까요? 아니요, 방해만 됩니다. 저 혼자 1분이면 완성할 것을 이 아이와 함께하면 5분 넘게 걸리는 거예요. 제가 정말 저의 하는 일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아이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알바생을 사용할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알바생이 저 혼자 1분이면 할 것을 5분 넘게 그러고 있으면 그 알바생은 더이상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자르겠지요. 그러나 내 자녀는 아니라는 거예요. 5분이 걸려도, 저를 더 귀찮게 해도,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아빠는 이 아이와 함께하는 그 시간이 즐거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낸 아이에게 칭찬을 해주는 것이죠. 그리고 이 아이는 그것을 가지고 엄마한테 자랑하는 거예요. "엄마 제가 이거 만들었어요!" 그게 뭐 아이가 만든거겠냐고요. 그러나 아빠는 그것을 아이가 만든 것이라고 해주고 칭찬해준다고요.

​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하나님은 열심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열심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도우시며,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나의 잘남과 나의 능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삶의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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