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도사/설교문

정체성 (창세기 17장 1절-14절)

하엘파파 2025. 2. 24.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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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창세기 17장 1절-14절)

 

말씀본문 : 창세기 17장 1절-14절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말씀제목 : 정체성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합니다. 신체적 성장뿐만 아니라 심리적 발달, 그리고 사회적 역할의 변화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생애주기'라고 부르는 것이죠. 생애주기를 이해하는 것은 개인의 성장 과정을 예측하고, 각 시기에 필요한 발달 과업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이대, 즉 13~18세를 생애주기에서 '청소년기'라고 부르고 이 시기에 신체적, 심리적으로 큰 변화를 경험하는 시기라고 하는데요, 사춘기를 거치면서 신체 발달이 급격히 진행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주요 심리적 발달 과업은 자아 정체성의 확립이며, 또래 집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독립성이 강화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청소년기가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시기라고도 하는거죠. 이 시기의 청소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이를 통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탐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여러분들의 나이대에 자아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그리 깊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태신앙으로 자라면서 자아정체성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었거든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너무 간단했던거죠.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 '나는 어디서 왔는가?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나는 어디로 가는가? 하나님께로' 너무 간단하고, 확실한 내용이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인 '정체성'이라는 것을 사전에 찾아보니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 라고 나오더라고요. 정체성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 정체성을 가지고 올바른 나의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죠.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과,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은 너무나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의 정체성을 다시금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정체성을 깨닫고 인생을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시는데요,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나타나십니다. 여러분 혹시 지난 주 말씀 기억나실지 모르겠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찾아오셔서 떠나라고 하셨던 그 내용 기억하십니까? 그 때 아브람의 나이가 몇살이었는지 혹시 기억나시는 분 계실까요? 네, 칠십오 세였습니다.

 아브라함 얘기가 참 재밌는데요, 간단하게 한번 쭉 훑어보겠습니다. 12장부터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데, 칠십오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거주하던 땅에서, 고향에서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들을 겪게 되는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을 주시는거죠.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티끌 같게 할거야",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에 보이는 모든 땅을 너에게 줄거야", "두려워하지 마,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줄거야", "하늘의 별들이 많은 것처럼 네 자손들이 이와 같이 많을거야" 이렇게나 많은 축복과 약속의 말씀들로 아브라함에게 계속 힘과 위로와 용기를 주셨단 말이죠. 그런데 16장에 와서 아브라함이 사고를 칩니다. 그냥 사고가 아니고 대형사고를 치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긴 받았는데 10년이 지나도록 애가 안생깁니다. 그러니까 어떤 선택을 합니까?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 대형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이 대형사고의 이면에는 사래의 역할도 있긴 했던거죠. 내 남편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대요. 하늘의 별과 같이 수많은 자손들이 있을 것이고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을 받았다는데, 애가 안생기는 겁니다. 1년을 기다리고, 2년을 기다리고, 3년을 기다리는데 애가 안생겨요.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서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애는 없어요. 그러니까 불안감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허락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통해서는 아이가 안생기니까 자신의 여종을 통해서 남편의 아이를 낳게 하는 사래의 마음이 여러분 상상이 되세요? 여러분 하실 수 있겠어요? 대단한 것도 대단한 거지만 그 사래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고 고통스러웠겠냐는 겁니다.

​ 저는 성경 속 남자들 보면 참 안타까운 인간들이 몇명 있는데요. 일단 아담. 하나님한테 혼날까봐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자신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여자한테 모든 탓을 했던 그 장면, 진짜 얼마나 안타깝고 찌질해보입니까.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브라함인데요.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로 놓고 보니까 엄청 대단해보이고 멋있어보이고 그렇지만 이 아브라함이 한짓들 보면 진짜 입이 쩌억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십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을 통해 나눠보게 될테지만, 야곱도 진짜 혀를 차고 뒷목을 잡게 하는 일들을 벌이거든요.

 아무튼 이 아브라함이 진짜 안타까운게, 아니 자신의 아내가 여종을 통해서 아이를 낳으라고 했을 때 그걸 오케이를 하고 그렇게 했다는 게 진짜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아니 남자가 좀 멋있게, "여보,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당신밖에 없어! 그리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가실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그런 생각은 앞으로 절대 하지마! 사랑해 여보!" 이랬으면 이거 성경 최고의 로맨틱 가이가 되지 않았겠냐고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브라함은 사래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수락하게 됩니다.

 남자분들 잘들으세요. 연애를 하다보면, 여자친구가 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말 잘들어버리는 순간 이런 일을 당하는 거라고요. 여자친구가 "아 몰라, 나 집에 갈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대로 집에 데려다주면 끝장나는 거예요. "아 몰라, 안먹어. 너 혼자 다 먹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대로 진짜로 나 혼자 다 먹어버리는 순간 감당하지 못할 시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 사래가 10년 동안을 그렇게 맘고생을 하고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워서 남편에게 "남편, 난 안될 것 같아.. 내 여종을 통해서 아이를 낳도록 해.." 라고 했을 때 그게 사래의 진심이었겠냐고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겁니다. 그 이후에 보면 아브라함과 사래, 하갈, 이스마엘 다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고 사람의 생각과 계획으로 일을 저질렀을 때 이런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아무튼 그렇게 12장에서 칠십오 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약속을 받은 후에 16장에 와서 10년 뒤인 팔십오 세에 결국 하갈과 동침을 해서 팔십육 세에 이스마엘을 낳게 되고, 17장에 와서 구십구 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16장에서 17장으로 넘어간 때가 이스마엘을 낳고 13년 뒤에 나타나셨다는 거예요. 이것을 놓고 여러 신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한데, 누군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기다리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기간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브라함이 13년 동안 성경에 기록할만한 별다른 특별한 믿음의 모습이 없었던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하나님께서 왜 아브람을 칠십오 세에 부르시고 구십구 세에 찾아오셔서 백 세에 아들을 낳게 하셨는지 너무 정확하게 보게 된 것이 있는데요, 창세기 15장에 보니까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이 다 계획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잠깐 15장 13절부터 16절까지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아마 교회를 짧게 다니신 분들은 조금 모르실 수도 있고, 교회를 좀 오래 다니신 분들은 이 내용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살게 될 때부터 출애굽을 하게 되는 그 모든 사건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시고 그 일들을 계획하고 계셨다는 거예요. 10년, 100년, 1000년 후의 그 모든 일들까지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들을 이뤄나가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통을 주시고, 고난을 주시려고 그에게 25년을 기다리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그 때에 이삭이 나와서, 그리고 또 야곱이 나와서, 그리고 또 열두명의 아들들이 나와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그 모든 일들을 이뤄나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고 안낳고 상관없이, 아브람이 백 세가 되던 때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에 맞게 이삭이 나왔을 것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인간의 생각대로 사고를 쳐서 삐지셔가지고 침묵하신 기간 때문에 아브라함이 백 세에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니라는거죠.

​ 아브라함 생각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사래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 아들을 낳은 거예요. 그거 뭐 아브라함이 일부러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보면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도와드린 거라고요. 자손이 많으려면 아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들이 안생기니까 나름의 노력으로 아들을 생기게 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 도와드린거 아녜요. 그러나, 하나님께선 그거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입장에선 고마운 게 아니라 굉장히 교만한 생각인거죠.

​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계획대로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시는데 인간이 무슨 하나님을 돕겠다고 뭘 한다고 하냐고요. 여러분 우리 착각하면 안됩니다. 내가 하나님 도와드리는 거 아니에요. 내가 헌금 내는 거, 내가 봉사하는 거, 하나님 그거 없으면 일 못하시는 분입니까? 절대 아니라고요. 내가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해 주시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음에,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거라고요.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구십구 세의 아브람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시는거죠. 우리 1절 말씀을 다시 한번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먼저 그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의 생각으로는, 인간적인 그 생각으로는 안될 것 같다는 너의 그 생각으로 너는 너의 여종을 통해서 아들을 낳았지만, 나는 못할 것이 없는 하나님이야" 그러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라는 것을 정확하게 말씀해주시는거죠.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이 구절의 내용이 조금 이해가 안가고 별로 와닿지 않으실텐데요. 영어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walk before me" 직역하면 "내 앞에서 걸어라" 라는 뜻인데 이것도 조금 애매하시죠. 이 말의 뜻은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서 길을 보여주거나 위험한 상황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하겠다'는 의미를 갖기도 하고요, '자신이 앞장서서 이끌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이 되기도 하는 말인 겁니다. 또한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거나 도움을 주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종합해보면 "내가 다 이끌어주고 도와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딱 붙어라"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서 "완전하라" 이것도 영어로 보면 "and be blameles" "흠이 없어라" 라는 말입니다. 흠 없이 살으라는 것입니다. 비난 받을 일 없이 살으라는 거예요. 이것은 결국 자신이 맡은 일이나 역할에 대해 완벽하게 수행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흠이 없고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사람이 되라는 거예요. 왜그랬겠습니까? 4절과 5절을 봅니다.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 "너는 이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존재야. 그러니까 비난 받는 일 없이 살아야 해" 라고 그에게 책임을 부여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시는 겁니다. 원래 '아브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큰 아버지', '좋은 아버지'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이라는 이름의 뜻은 '열국의 아버지'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너 이스마엘의 아버지로만 있을 사람 아니야! 너는 열국의 자손들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야!" 라고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는 겁니다.

​ 생각해보세요. 이스마엘은 사래로부터 낳은 아들은 아니었지만 아브람의 씨로 인해 노년에 얻은 자신의 아들입니다. 얼마나 좋았겠어요. 내 아들과 함께 살아간 그 13년이라는 세월이 뭐 앞에서 하나님이 침묵하신 기간이다 어쨌다 했지만 아브람은 그래도 살아갈만 했을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요. 아들도 낳았겠다 이제 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들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거죠. 아니 어쩌면, 하늘의 별만큼의 자손들이 아니더라도 이스마엘, 자신의 하나뿐인 이 아들만 보면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저도 딸 아이만 낳아서 키우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나 더 낳지" 뭐 이런 말을 들어도 물론 아이가 한명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사실 뭐 그리 필요성을 못느끼거든요. 한 아이만 있어도 충분히 행복하고 좋은 겁니다. 이 아이만 있어도 너무 좋다고요. 아브라함도 어쩌면, 뭐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 굳이 뭐 그정도 욕심 없었을 겁니다. 이스마엘, 그 아들만 봐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아니라는 겁니다. 이스마엘의 아버지로만 있게 하려고 너를 그 땅에서 불러낸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그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내고 24년을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아브람은 10년 기다리다 지쳐서 그 사고를 쳤는데, 하나님께서는 24년을 기다리고 계셨다는 거예요.

​ 여러분, 삶을 살다보면 힘들고 지치는 때가 있습니다. 뭔가 믿음대로 산다고 사는데 별로 뭐 대단한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 것 같고, 믿음으로 사는만큼의 열매가 있지도 않은 것 같고,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고요.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그 시간들을 하나님께서도 함께 보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만 기다리면서 지치고 힘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묵묵히 여러분 곁에서 기다리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그 때가 왔을 때,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여러분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그 일들을 반드시 이뤄나가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는 이정도의 꿈밖에 꾸지 못하고 이거밖에 생각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할 일들을 꿈꾸시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거예요.

 

 누군가는 사과를 보고 그 사과 하나를 맛있게 먹을 생각만 하지만, 누군가는 그 씨앗을 심어서 사과 나무를 키울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사과나무를 통해 얻은 과실들로 더 많은 나무를 심을 생각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누군가는 그 나무들로 과수원을 차릴 생각을 하는 겁니다. 또 누군가는 과수원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다른 과수원을 넓힐 생각을 하는 것이고, 누군가는 그 과수원들로 얻은 수익으로 학교를 만들 생각을 하는거죠. 또 누군가는 그 학교를 다닐 학생들 중에 미래를 책임질 다음 세대의 위인을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과 하나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는 사람과, 다음 세대의 위인을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의 차이보다 더 큰 차원의 생각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우리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일들을 이뤄나가실 줄 믿으시라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10절을 보겠습니다.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을 말씀해주시고, 그것을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징표로 할례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할 수 있도록 그것을 몸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구별된 모습을 취하라는 거예요. 그것을 표시하고 그 약속을 항상 기억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할례라는 것은 여러분들 아시는 것과 같이 지금의 포경수술 같은 것인데요, 남자의 중요 부위의 표피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전문병원에서 마취도 하고 여러 좋은 장비들을 통해 수술을 하는 것이지만, 이 때 당시에는 돌칼로 그 표피를 벗겨내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고통일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인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고통이 따르는 것을 명하셨을까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깨닫게 되더라고요. 언제나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은 하루에 소변을 보러 몇번을 화장실을 가시는지 모르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마도 적어도 두번 이상은 무조건 갈 것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도 당연히 그랬겠죠. 소변을 볼 때마다 그 상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생각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다가도, 근심 가운데 있다가도 화장실은 무조건 갈 수밖에 없잖아요. 그 때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서 '아, 그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이 있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그 근심과 걱정을 떨쳐내는거죠. 다시는 인간의 생각으로 또 실수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명확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너의 정체성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도 하나님의 그 약속을 받은 자들임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비록 몸에 할례를 행하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할례를 행한 자들임을 믿으시라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구별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기억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브람은 칠십오 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던 곳에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 정체성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기에 인간의 보이는 모습으로 인해 여러번 무너지는 일들이 반복되었던 것이죠. 그리고 결국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연약한 아브람에게도 하나님께선 그 분의 약속을 잊지 않고 이루시기 위하여 찾아와 주시고, 그에게 다시금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나도 너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때가 되었으니 그 약속을 이룰 것이다" "너와 나의 약속을 기억하렴" 하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실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에 믿음의 조상의 타이틀을 얻게 되는 놀라운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죠. 정체성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되니까 믿음의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평범했던 소상공인 아브람을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정체성을 바꿔주신 하나님, 애굽의 노예로 있었던 히브리 사람들을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나라와 민족으로 정체성을 바꿔주신 하나님, 양치는 소년 다윗을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정체성을 바꿔주신 하나님, 물고기 잡는 어부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정체성을 바꿔주신 하나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사울을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예수를 전파하는 사도로 정체성을 바꿔주신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을 바꿔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길을 가고 어디를 가든지,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된 정체성을 잊지 마시고, 세상의 사람들과 같이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그것을 믿음으로 살아감으로 인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것을 바라보며 기쁨과 감사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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