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테스트
말씀본문 : 창세기 22장 6절-14절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말씀제목 : 사랑의 테스트
저희 딸 하엘이 통장에 100만원 정도가 있거든요. 세뱃돈이나 이런 저런 일들이 있을 때 받는 용돈들을 다 통장에 저금을 해놓다보니 100만원 정도의 금액이 모여있는 겁니다. 게다가 아직 어리고 하니까 이 아이가 돈을 쓸 일도 없고 그래서 그냥 보관되어 있는 돈인거죠. 그래서 가끔 아이가 오뎅이나 떡볶이를 사달라고 할 때 아이한테 "너 돈 많잖아. 하엘이 돈으로 사먹자" 이러면 완강하게 거부합니다. 엄청 아끼는 거예요. 그러다가 가끔씩 엄마나 아빠가 아이에게 장난을 칠 때가 있습니다. "하엘아, 엄마 오늘 너무 피곤한데 하엘이 돈으로 엽떡 사줘", "하엘아, 아빠 오늘 치킨이 땡기는데 하엘이가 치킨 좀 사줘라" 그러면 거의 거부를 하는데 어떤 때는 "그래" 라면서 오케이를 할 때가 있는 겁니다. 그럼 엄마와 아빠는 감동을 하는거죠.
그리고 실제로 치킨이나 엽떡을 사먹곤 하는데, 엄마아빠가 진짜로 그 아이의 통장에서 그 금액만큼을 꺼낼까요? 안꺼냅니다. 어차피 엄마나 아빠가 살 생각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아이를 시험해보는거죠. 이 아이가 엄마아빠를 위해서 자신의 아끼는 것을 내어주는지 안내어주는지를 본다는 거예요. 그것을 왜 보고 싶어하겠습니까?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자신이 아끼는 것을 엄마아빠에게 내어주는지 안내어주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당연히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확인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확인 되었을 때 사랑의 감정이 더 올라오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게 사랑의 교제를 이어가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읽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를 깨닫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아마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신 분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읽은 본문의 앞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를 한번 되짚어보고자 하는데요.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약속의 아들이 태어나게 된 것이었죠. 얼마나 예뻤겠어요. 우리 말에도 '눈에 넣어도 안아프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자식이 얼마나 예뻤겠냐고요. 저도 완전 딸바보 아빠라서 제 딸을 보면 너무 예쁘거든요. 그냥 이렇게 있다가 딸을 보면 너무 예뻐서 "뭐야, 뭐 이렇게 예뻐! 이게 무슨 내 딸이야!" 이러고선 막 껴안고 뽀뽀하고 막 어쩔줄을 몰라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제 얘도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아빠가 그러면 좀 거부하고 질색하고 그러는 것이 참 아쉬운데 그럼에도 아빠는 막 딸을 향한 눈빛이 하트가 뿅뿅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라고 달랐겠냐고요. 그 노년에 얻은 아들이 얼마나 예뻐보였겠습니까.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21장에 어떤 하나의 사건이 생기게 되는데 어떤 사건이냐면, 하갈을 통해 먼저 낳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 겁니다. 무엇으로 놀렸을지는 성경에 자세하게 나와있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서 사라가 굉장히 화가 많이 난거죠.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쫓으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이 일로 인해서 아브라함은 굉장히 괴로워합니다. 21장 11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11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아들도 자기 아들이므로, 이 일로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아무리 여종을 통해서 낳은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들인 것은 변함이 없는거죠. 그런데 그 아들을 내쫓으라니 어떻게 괴롭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내쫓자니 내 아들을 버리는 일은 도저히 못하겠고, 그렇다고 데리고 있자니 아내 사라와의 갈등이 너무 심하게 되고 너무 괴로운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라가 말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너에게 약속한 아들은 이삭이라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잔인하고 서운할 수밖에 없는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이러한 말씀으로 안심을 시켜주시는 겁니다.
21장 12절에서 13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거죠. "12 그 아들과 그 어머니인 여종의 일로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사람이 너의 씨가 될 것이니,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어라. 13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아들도 너의 씨니, 그 아들은 그 아들대로, 내가 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 두가지의 내용으로 안심을 시켜주시는데, 하나는 이삭을 통해서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것과, 또다른 하나는 너의 또다른 아들인 이스마엘도 하나님께서 지켜줄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게 됩니다.
그러고나서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누구밖에 안보이겠습니까? 이삭밖에 안보이는거죠. 이제 정말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둘도 없는 너무나 귀한 아들인 거예요. 그렇게 이삭이 어느정도 자랐을 때에, 22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그런 여러가지 일들이 있은 후에,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하트가 막 뿅뿅 나오고 있을 때에, 아들바보로 살아가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뭘 하셨다고요? 시험을 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청천벽같은 명령을 하시는거죠. 어떤 명령이었습니까? 창세기 22장 2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번제라는 것은 그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가죽을 제외한 그 모든 것들을 다 불로 태워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뭔가 새로운 형태의 번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물을 잡아서 올려드리는 그 행위와 동일한 것이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고대 가나안 땅에서는 몰렉이라는 신에게 아이를 불로 태워 바치는 그런 제사제도가 있었습니다. 인신공양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브라함도 가나안 땅에 거주하면서 그러한 문화를 모르지 않았을 거라는거죠. 그러나 하나님은 인신공양을 원하는 신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하죠.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형상대로 만든 그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시는 신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것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 것이었죠.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아, 여호와라는 신도 아이를 제물로 받으시는 분이었구나', '여호와라는 신도 인신공양을 원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어요? 그러면서 막 원망도 생기고 분노도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줄 땐 언제고, 이제는 번제로 바치라니. 보기만 해도 예뻐 죽겠는 내 아이를 내 손으로 죽이고 내 손으로 가죽을 벗겨서 내 손으로 불로 태워야 하는 그 행위를 어떻게 할 수가 있겠냐고요.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지 않았겠습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도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니까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못할 것 같더라고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런 명령을 하신다면 아예 듣자마자 그냥 막 원망하고 화낼 것 같은 거예요. 차라리 저를 데려가시라고 배 깔고 누웠으면 누웠지, 내 손으로 내 딸을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고요.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고 왜 이런 맘이 안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명령을 듣고 바로 다음날 아침 일찍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산으로 이삭과 함께 출발하는 것입니다. 2절에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3절에 다음날 아침에 바로 출발한단 말예요. 아마도 아브라함에게 그 하룻밤은 정말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밤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잠이 오겠어요. 다음날이면 내가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을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겠습니까. 자려다가도 일어나서 아무것도 모르고 곤히 자고 있는 이삭의 얼굴을 한번 보면서 또 많은 생각에 빠지고, 그러다가 아내 얼굴도 한번 보고 또 많은 생각에 빠지고.
아마 상상해보건데 사라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을 말도 안꺼냈을 것 같습니다. 아내 사라와 상의를 했다면 사라는 절대 허락해주지 않았겠죠. 생각해보세요. "여보, 하나님께서 우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네.. 그래서 내일 아침에 일찍 떠나려고 해. 잘 바치고 올테니 마지막으로 이삭 얼굴 많이 봐둬요" 이런 말을 할 수가 있겠냐고요.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하면 사라의 반응은 어땠겠습니까? 남편이 드디어 결국 노망이 났다고, 미쳤다고 하면서 완전히 미친사람 취급하고 이삭 못데려가게 하려고 아이 데리고 도망을 가든 뭘하든 하지 않겠냐는 거예요. 그러니 아브라함은 정말 그 밤 중에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한숨도 못잤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마 그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한 끝에 아브라함의 결정이 바로 3절에서 볼 수가 있는거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론이 났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행동에서 아브라함이 어떤 결론을 냈는지를 볼 수가 있는 겁니다. 그 결론은 오늘 본문에서 읽지 않았지만 5절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함께 간 종들에게 너희는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선 뒤에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돌아올 때 나 혼자 오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의 8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앞에 7절에서 이삭이 아버지에게 물어보는거죠. "아버지, 근데 번제로 드릴 동물은 어디있어요?" 그의 순진한 물음에 아브라함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으면서도 믿음의 고백으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손수 마련해 주실거야" 종들에게, 이삭에게 안심시키고자 했던 선의의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아브라함의 그러한 말들 속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기대를 엿볼 수가 있다는 거예요.
어쩌면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때까지 그러한 바람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하나님께서 진짜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를 원하시진 않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무엇인가가 있겠지' 그러한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가는데 도착할 때까지 준비하신 양은 보이지가 않는거죠. 제단을 쌓고 나무를 쌓아올리는 동안도 준비하신 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제단 위에 번제물을 드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어요. 그때까지도 양은 보이지 않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이삭을 묶습니다. 그리고 그 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놓는거죠. 이삭도 그제서야 자신이 번제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양은 보이지가 않아요.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진짜구나.. 하나님이 진짜로 내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를 원하시는거구나.. 준비하신 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구나..' 완전히 절망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눈물이 막 그렁그렁 맺히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결국엔 손에 칼을 잡고 진짜로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아브라함!!" 그 소리에 아브라함은 깜짝 놀라서 "네,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는거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말하는 내용을 보겠습니다. 12절입니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천사가 놀라서 아브라함을 진정 시키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갖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놓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얻을 수가 있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13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양이 그 모든 시험을 통과하고 난 뒤에, 그제서야 보이는 것입니다. '거의 다'라는 것은 '완성'이 아닙니다. '완성'이 되어야 그것을 '완성'이라고 하는거죠.
여러분은 혹시 등산을 좀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하도 산을 많이 타가지고 군대를 다녀온 뒤로는 산은 쳐다도 보기 싫어했었는데요. 등산을 하다보면 진짜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안보이거든요. 그렇게 막 지쳐있는 모습을 보면 어른들이 꼭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거의 다 왔어. 힘내" 그럼 그 말을 믿고 또 올라가는데 계속 올라가는 것 같은 거예요. 끝이 안보입니다. 그 때 또 어른들은 얘기하는거죠. "진짜 거의 다 왔어. 좀만 더 힘내" 거의 다는 말 그대로 거의 다 인 것입니다. 거의 다 한 것을 가지고 다 했다고 얘기하지 않는 거예요. 정상까지 가야 정상까지 간 것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거의 다 가봤다고 하는 것으로 정상을 갔다고 할 수 없다는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의 다 믿었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나무 장작까지 다 쌓아 올렸는데도 양이 보이지 않았어요. 이삭을 묶었는데도 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놨는데도 양이 보이지 않는거죠. 그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렇게 따져묻는 겁니다. "하나님, 이정도 했으면 된거 아닙니까?! 이정도까지 했으면 된거 아니냐고요! 어떻게 진짜로 이삭을 잡으라는 겁니까! 이정도 했으면 양을 보여주셔야 되는거 아니에요?!" 만약 이러한 행동을 했다면 아브라함은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아침에 일찍이 출발했어도, 아무리 그 산에 갔어도, 아무리 제단을 쌓았어도, 아무리 이삭을 묶었어도, 아무리 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놨어도, 최종 믿음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거의 다 믿었다는 것은 완전한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거의 다 통과한 것은 통과가 아닌거죠. 완전한 믿음으로 완전한 합격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14절을 봅니다.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모든 테스트를 통과한 아브라함은 그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그 순간부터 다음날 아침이 되기까지 잠을 한숨도 못잤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생각들을 했겠죠. '하나님께서 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일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이었나', '지금까지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일들을 행하셨었나' 그러한 고민의 끝에서 아브라함은 정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라는 결론을 얻게 되지 않았겠냐는 거예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 19절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까지 했다는 겁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만약, 내가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니 하나님은 이삭을 다시 살려내실 것이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결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음날 일찍부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그곳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하는 행동까지 나타내 보일 수 있었다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믿음의 행위로 인하여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는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테스트를 하신 것일까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자신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깨부시길 원하셨던 거예요. 하나님이 보실 때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곧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우선적으로 여기는 것, 내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것을 하나님은 부숴버리시는 거예요. 부수게끔 시키시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부수며 하나님 앞에 내어드릴 때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시는 거예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그것의 주권은 너에게 있지않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 절대 놓지 못하겠는 그것, 이거 하나님께 드리면 내가 망할 것 같은 그것.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릴 때에 오히려 우리는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나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그것에 주권자가 되려하면 오히려 그것에 얽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는거죠. 여러분, 여러분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 여러분이 절대 놓지 못하겠는 그것, 하나님께 내어 드리십시오. 하나님께 맡겨보세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시려는 게 아니라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하시고 더 좋은 것들로 채워주시려는 것임을 믿으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해놓으신 것들이 있다는 거예요. 내가 믿음으로 그것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에 그 준비하신 것들을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이정도 했으면 보여주실 것 같은데, 이정도 했으면 보여주셔야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그 때에도 인내하며 믿음의 걸음을 계속해서 걸어나가십시오. 거의 다 온 것은 다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가 완전한 믿음의 행위로 나타내어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하신 것들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행하시는 사랑의 테스트를 통과해보세요. 그 테스트를 통과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그 수고와 몸부림을 아심으로 그 모든 마음을 위로해주시고, 사랑으로 안아주시며, 헤아릴 수 없는 은혜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힘든 일들이 있을지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마주할 때에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그래도 믿음을 끝까지 붙잡고 나아가보십시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임을 믿으며 끝까지 그 믿음의 걸음을 걸어가보세요. 하나님은 그 때 준비하신 것들로 일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테스트에 통과함으로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이어가며, 믿음의 발걸음을 힘차게 걸어감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누리는, 기쁨과 감사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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