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도사/설교기록

환호의 이유 (마가복음 11장 1절-11절)

하엘파파 2025. 9. 1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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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의 이유

말씀본문 : 마가복음 11장 1절-11절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말씀제목 : 환호의 이유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앞에 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일에 대한 기독교의 기념일로 부활절을 앞둔 주일을 종려주일로 기념하고는 하는거죠. 그리고 월요일부터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매년 있는, 너무나 당연한 어떤 연중 행사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내용이거든요. 어쩌면, 크리스마스보다도 더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부활절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그만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아니 인류 전체에 있어서 너무나 큰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이 위대하고 대단한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내용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3년 정도의 시간을 공생애 사역을 하시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 한마리를 끌고 오게끔 시키십니다. 사복음서의 내용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뭔가를 타고 다니시는 장면이 나오지 않거든요. 유일하게 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가시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수님을 떠올릴 때 예수님의 이미지가 보통 어떤 이미지입니까? 권위적이고 화려한 모습인가요, 아니면 겸손하고 수수한 모습인가요? 겸손하고 수수한 모습의 이미지가 그려지실 겁니다. 단순하게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가 아니라 실제로도 예수님께서는 권위적이고 화려하고 이런 모습이 아니라 항상 겸손하시고 낮추시고 수수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던거죠.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이 날은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겠다는 거예요. 아마 제자들도 조금 의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신 이유가 있는거죠. 그것은 바로 약속의 말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고자 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메시아의 등장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날만큼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그말은 다시 말해서 "내가 메시아다"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행위였다는 거예요. 이전까지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숨기셨습니다. 물론 어떤 기적적인 것들을 이곳 저곳에서 많이 나타내시고 보이시기는 했습니다만, 대놓고 "내가 메시아다"라고 나타내 보이시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가나의 혼인잔치 사건이 나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많이 아실 거예요.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보고 어머니인 마리아가 예수님께 얘기를 했더니 예수님께서 거절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신단 말예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마치 왕이 입성하듯이 화려하게 입성을 하시는 장면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인즉, 예수님의 때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때, 가장 완전한 때에 약속과 계획을 이루신다는 거예요.

​ 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신 것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왕이나 정복자들이 뭔가를 탈 때는 보통 말을 탑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에 대한 출정을 의미하기도 하는데요, 반대로 나귀는 평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들이 전쟁을 나설 때는 말을 타고 나서지만 승리를 하고 돌아올 때는 나귀를 타고 돌아오는 것을 통해 평화를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는 거예요.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을 들어가신다는거죠. 그렇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실 때 어떤 장면이 연출됩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길바닥에 깔면서 환호를 지르며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국가적 귀빈들이나 국가원수, 대통령들이 어떤 행렬을 하게 되면 바닥에 뭐가 깔리죠? 네, 레드카펫이 깔리는 것입니다. 양 옆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환영의 손짓을 하며 환호를 지르며 맞이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레드카펫을 대신해서 자신들의 겉옷을 길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호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뭐라고 환호하고 있는지 9절과 10절의 말씀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 사람들이 막 소리치면서 환영하고 있는 거예요. "호산나!! 호산나!!" 이 호산나라는 말의 어원을 보면 히브리어 '호쉬아나'에서 유래가 된 것인데, '호쉬아'는 '구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나'는 '지금 바로', '제발'이라는 의미의 부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직역하면, "지금 구원하소서!", "제발 구원하소서!"라는 뜻이 되는 거예요. 영어로는 "Save us, now!" 또는 "Please, save us!"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예수님 시대 때에서 '호산나'의 의미는 민족주의적 행사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거죠. 즉, 지금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메시아는 메시아인데 영혼의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들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로부터의 해방,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외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일종의 "대한독립 만세" 이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소식이었어요. 그들은 마음껏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환호를 하고 있는거죠. "예수님이 오셨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다!!" 겉으로만 봤을 땐 너무나 뿌듯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환호였습니다. 환호의 이유가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 제가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딸이 막 반기는거죠. 아빠한테 와서 안기고 아빠 왔다고 막 좋아하는 거예요. 뿌듯해하고 있을 때쯤 딸이 이 한마디를 하는 겁니다. "아빠, 나 핸드폰 시간 줘" 휴대폰 사용 시간 제한이 걸려 있는데 아빠가 왔으니 이제 아빠한테 휴대폰 더 하고 싶다고 시간을 달라는 겁니다. 이 아이는 아빠를 기다린 겁니까, 휴대폰 시간을 기다린 겁니까? 이 아이는 아빠를 환영한 건가요, 휴대폰 시간을 환영한 건가요?

 지금 이곳에서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 이 사람들이 이런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다고 좋아했어요. 예수님은 이 당시에 완전 센세이션한 인물이었습니다. 온 동네방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안퍼진 곳이 없는거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맹인을 눈 뜨게 하고, 물고기 두마리와 떡 다섯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심지어 죽었던 사람도 살려냈다는 그런 소문들 말예요. 그런 소문들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컸겠습니까? 얼마나 팬덤이 형성 되었겠어요. 그렇게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라는 인물이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이라는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각지 각곳에 퍼져 있던 유대인들이 이 유월절이라는 명절 시즌만큼은 예루살렘에 다 모였다는 거예요. 말그대로 민족대명절이었습니다. 축제인 거예요. 그러니 당시 유월절 시즌에 예루살렘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모였겠어요. 그런데 이런 축제의 장에, 명성이 어마어마한, 이런 저런 대단한 소문이 여기 저기 다 퍼질대로 퍼져있었던 그 예수라는 인물이 나타나는 겁니다. 얼마나 보고 싶었고 만나고 싶었겠냐고요. 그러니까 온갖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예수님을 보고 환영을 하고 환호를 하고 소리를 치면서 반기고 있는 겁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반기면서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겠어요? "드디어 우리 나라가 로마를 이겨내겠구나", "드디어 우리 나라가 로마로부터 벗어나는구나", "드디어 우리 나라가 로마로부터 독립하는구나" 그 생각에 예수님을 향해서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서 레드카펫을 만들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목이 쉬도록 외치는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사람들이 막 반겨주니까 기쁘고 즐거우셨을까요? 뿌듯하고 행복하셨을까요? 아니었을 겁니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예수라는 인물이 뭔가 해줄 것 같으니까, 자신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것 같으니까 그저 기쁘고 즐거웠겠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선 아니라고요. 왜요? 이제 며칠 있으면 온갖 수모와 고난과 고통을 당하게 될텐데 그게 뭐가 기쁘겠어요. 너무나 끔찍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기쁠 수가 있겠냐고요.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세요.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10억을 준답니다. 그런데 그 10억을 받는 대신 5일밖에 못산다고 하는거죠. 5일동안은 그 10억으로 뭘해도 상관이 없는데, 5일째 되는 날에는 여러분들을 고문하는 거예요. 채찍으로 때리고 매로 때리고 여기저기 다 상하게 하는거죠. 그리고 최종적으로 매달아서 죽게하는 조건입니다. 여러분 그 10억 받겠어요? 그 10억 받는다고 기쁘겠어요? 5일동안 시원하게 그동안 못해봤던 거 다 해볼 생각에 막 두근거리겠냐고요. 어차피 한번 왔다가 한번 가는 인생 5일동안 짧고 굵게 즐기다 가시겠습니까?

 이러한 제안에 응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5일간의 그 호화로움이, 그 화려함이 무슨 가치가 있겠냐고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끔찍한 고통과 죽음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그 고통과 죽음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10억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호화로움과 화려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환영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띄워준다고 해서 예수님에게 뭐 특별히 얻어지는 것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고요. 예수님이 얻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사랑하는 영혼들의 구원이 있다면 있었겠지만 그렇게 안하셔도 예수님은 충분히 얼마든지 높은 보좌에서 모든 것들을 다 누릴 수 있는 분이셨잖습니까. 우리의 생각으로는 '굳이' 싶다고요.

 그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이 갈망하고 원하는 정치적 해방보다 더 근본적인 것, 죄로부터의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압제는 일시적인 문제지만 죄의 문제는 영원한 것이라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은 로마로부터의 자유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로마와 싸우기 위해 칼을 꺼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를 짊어 지신 것입니다.

 결국, "호산나"를 목놓아 외치던 그들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십자가에 못박으라!"라고 외칩니다. 왜그랬겠습니까? 자신들의 기대와 자신들이 원하던 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됐기 때문인거죠. 이들은 로마로부터 해방을 원했는데 예수님은 전혀 그런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거예요. 로마로부터의 해방은 커녕 로마 군인들에게 끌려가서 채찍질 당하고 있으니까 실망을 넘어 분노가 올라오는 겁니다. 그 소문들이 헛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겠죠. 내가 겨우 이딴 인간한테 기대를 하고 있었나 싶은 생각에 분노가 생기는 겁니다. "메시아라매? 구원자라매? 죽은 사람도 살리고 오천명도 먹였다매? 그런데 정작 자기는 저렇게 매맞고 끌려가고 있어? 다 가짜였구만! 다 헛소문이었어!" 이런 생각들로 가득찼던 것 아니었겠냐고요.

​ 우리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 잘된다길래 열심히 교회 다녀봤는데 뭐 달라지는게 없는거죠. 예수 믿으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는데 좋은 일은 커녕 더 힘든 일들만 많아진다고요. 그러한 것들을 보고 경험하며 교회를 떠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 계신 저와 여러분들은 그런 잘못된 환호로, 잘못된 생각으로,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볼 때 예수님은 실패자였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 십자가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위대한 승리였던 것이죠. 예수님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승리해내신 것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힘과 폭력이 아닌, 사랑과 희생을 통해 승리하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 승리는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닌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을 영원히 이겨내시는 승리로 결말을 맺었음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이유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이유로 예수님을 믿고 계신가요? 예수님 믿으면 그래도 뭔가 성공할 것 같아서? 예수님 믿으면 그래도 뭔가 남들보다는 잘 살 것 같아서? 예수님 믿으면 그래도 뭔가 얻는 것이 있을 것 같아서? 그러한 이유들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그 수많은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환호의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진정한 환호는 예수님 자체에 대한 기쁨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그 모든 것을 내어주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알아서, 그것이 너무 감사해서, 나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해주시는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서, 그렇게 만나주시는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환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감격의 환호, 그 은혜의 환호, 그 사랑의 환호가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환호와 찬사를 받으셨지만, 그 분이 걸어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는 거예요. 자신이 겪게 될 그 모진 수난과 고통과 아픔의 일들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 수많은 영혼들을 위하여 그 십자가의 길에 발을 내딛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보내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종려주일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거죠. '나는 어떤 이유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거예요. 물론, 그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는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 이후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거예요.

 이번 한 주간,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활절 아침이 찾아왔을 때, 그 때에 우리가 비로소 진정한 이유로 환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어떤 소원을 이뤄주기 위한 분으로 외치는 환호가 아닌, 나의 어떤 잘됨을 위한 분으로 외치는 환호가 아닌, 나의 삶을 구원해주시고 그 분의 인도하심으로 은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신 내 삶의 참 주인되시는 주님께 외치는 진짜 환호, 감사함으로 외칠 수밖에 없는 '호산나'의 외침과 환호가 우리의 삶 가운데 가득 넘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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