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도사/설교기록

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의 시작 (창세기 37장 25절-36절)

하엘파파 2025. 9. 23. 09:58
반응형

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의 시작

말씀본문 : 창세기 37장 25절-36절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말씀제목 : 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의 시작

 

 우리는 지난 주에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실지 그에게 꿈을 통해 스포일러를 해주시는 장면을 나눠봤습니다. 열두 형제 중에 열한 번째인 요셉이었지만 그의 꿈을 통해 그의 모든 형들이 요셉에게 절을 하게 되는 모습이 나타날 것이라고 그 장면을 보여주셨다는 거예요. 너무나 기대가 되고 너무나 좋은 꿈이었음에는 분명하겠지만 형들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꿈 자랑만 하던 요셉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형들로부터 안그래도 미움을 받았는데 더 미움을 받게 됐었죠.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형들이 있는 곳에 가서 형들이 잘 있는지, 양떼를 잘 보고 있는지 보고 오라고 보내는 거죠. 요셉은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러 형들에게 가게 됩니다. 형들에게 거의 다가갈 때쯤, 형들이 요셉을 보더니 요셉을 죽이자고 모의를 하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형제이고 동생인데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미워했다는 것이 참 안타깝지 않습니까? 형제 있으신 분들, 조심하세요. 가족이라고 그냥 다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고 편하다고 해서 막 말하고 그러면 안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모의를 하고 그를 구덩이에 넣어서 가둬놓은 겁니다. 그러고선 자기들끼리 밥을 먹고 있는 중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는 겁니다. 그 상인들을 보고선 유다라는 형이 "우리가 동생을 죽여서 뭐하냐, 그냥 팔아버리자"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러고선 진짜로 형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 넘긴 거예요. 이게 형들이 맞습니까? 이 인간들 보면 진짜 어마어마 하다고요.

 

 팔아넘기고 났더니 르우벤, 큰 형이 와서 요셉이 사라진 걸 알아챕니다. 그러고선 완전히 절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 장면만 보면 그나마 나아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사실 좀 이해가 안가는 모습이기는 해요. 그렇게 요셉을 살릴 생각이었으면 자기가 맏형이고 하니 애초부터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자는 의견을 낼 때 그 때 이미 막아섰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모습을 통해서 르우벤은 맏형이었지만 다른 형제들의 눈치를 보는 성격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리더십이 없었던 거죠. 그러고선 요셉이 사라진 것을 보고 절망하는데 절망하면서 말하는 대사를 보세요.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이러고 있는 거예요. 아이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요셉을 걱정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요.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가 얘기할 때 다른 형제들이 청종했다는 것을 보면 유다는 리더십이 있었던 것 같아요.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했을 때 유다는 '죽여서 뭐하냐, 돈이라도 벌자' 하고선 죽이진 않고 노예로 팔아 넘기는 선택을 하긴 하지만 죽이는 것과 뭐가 다르겠냐는 겁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양하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어놨는데 이름값을 못하고 있는 거죠.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지음바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고요.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할 때 이런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커녕 돈을 찬양하는 인생이 되어 버린다고요. 자신의 혈육조차도 동생이 아닌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 형제들의 하는 짓을 보십시오. 요셉이 입고 있던 옷에 염소의 피로 적시고 마치 짐승에게 잡아 먹힌 것처럼 옷을 찢어 놓고선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요셉의 옷이 맞냐고 물어보는 겁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는 겁니다. 르우벤이나 유다나 나머지 형제들이나 다를 게 없다고요. 열 명의 형제들이 공범이 되어버린거 아닙니까. 맏형은 다른 형제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자신만을 생각하느라고 요셉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죠, 유다는 동생을 돈벌이 수단으로 보고 노예로 팔아 넘겼죠, 다른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했죠.

 이런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 야곱의 형제들을 보면서 야곱이 자식들에게 신앙으로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음을 보게 되는 거예요. 부모가 자녀에게 제대로 된 신앙관을 배우게 하지 못하면, 자녀들이 제대로 된 신앙관을 갖지 못하게 되면 이런 모습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 그 야곱이잖아요. 하나님께서 택하여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고, 약속을 주시고, 함께 해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 위기들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그 위기를 하나님으로 인해 벗어나게 되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심을 체험했잖아요. 하나님께서 '너는 하나님을 이긴 자다'라고 하시면서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실 정도로 그렇게 존귀하게 여겨주셨던 인물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자녀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신앙관을 갖게 했어야 되지 않냐고요. 자녀들이 올바른 신앙관을 가졌다면 자신의 형제, 그것도 막내나 다름 없는 그 열일곱 살 아이를 죽일 생각을 하겠냐는 겁니다. 노예로 팔아 넘길 생각을 하겠냐고요. 아니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도 세상 사람들도 이런 짓을 감히 어떻게 생각을 하겠냐는 거예요.

 

 결국 그렇게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로 야곱이 얼마나 괴로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까. 우리 지난 시간에 나눴던 것처럼 가족이 완전히 다 몰살될 뻔하기도 하고, 이번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아들도 그 형제들에 의해 잃어버리게 되잖아요. 자신의 자녀들이 다 자신을 속이고 있지 않습니까. 나중에야 요셉이 총리가 되고 다시 만나게 되기는 하지만 그 세월동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갔겠냐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향으로 살지 못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가정의 형제들이었다고요. 그럼에도 올바른 신앙관이 잡히지 못하니 이런 악한 모습들이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가치 속에서, 세상의 잘됨을 좇게 되면 하나님의 사람된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곳에 계신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이 말하는 물질적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참 된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을 살아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7장 25절부터 35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절망 그 자체입니다. 그야말로 막장드라마가 따로 없는 거죠. 형들이 동생을 죽일 생각을 하고, 그러다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 넘깁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는 자신들이 동물의 피로 물들인 요셉의 옷을 갖다 주고 아버지를 속이는 거죠. 그리고 그 옷을 보게 된 야곱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짐승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슬픔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야말로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절망적인 상황이 어디있겠냐고요. 집 안에서 가장 예쁨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형들도 못입은 채색 옷을 입을 정도로 예쁨을 받았어요. 형들이 일 하러 나갈 때 요셉은 아버지와 함께 집 안에 있는 겁니다. 그야말로 차별대우를 어마어마하게 받은 거죠. 생각해보세요. 형들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차별대우를 받을 정도면 얼마나 차별대우를 받았겠습니까. 형들은 누려보지도 못한 것들을 다 누리며 살지 않았겠어요? 형들이 채소반찬 먹을 때 요셉은 고기반찬 먹고, 형들이 싸구려 옷 입을 때 혼자 비싼 옷 입고, 형들이 뼈빠지게 일하고 있을 때 요셉은 아버지랑 놀러 다니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 지홍이는 맨날 공부하고 알바하고 학원가고 이러는데 연홍이는 맨날 엄마아빠랑 해외여행 다니고 국내여행 다니고 호캉스 다니고 이러는 거죠. 현서는 맨날 나이키 신발 신고 있는데 현노는 맨날 나이스 신발 신고 있고 그런거 아니겠냐고요. 이정도가지고 죽이고 싶단 생각까지 들겠습니까. 이런 정도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로 차별대우가 있었으니 형들이 죽이려고 했던 것 아니겠냐는 거예요. 그렇다는 것은 엄청 편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고생을 모르고 살았다는 거예요. 그렇게 꽃길만 걷고 비단길만 걷고 황금길만 걷던 요셉은 한순간에 죽음의 위기에 놓였다가 노예로 팔려가게 된 겁니다. 한순간에 말예요. 여러분 맨날 침대에서 푹신하게 자다가 한순간에 어디 필리핀이나 베트남 같은 곳으로 팔려갔다고 생각해보세요. 손에 물한방울 안묻히며 그냥 편하게 살다가 언어도 안통하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노예로 팔려가게 되면 그 절망감이 어떻겠습니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냐고요. 

 여러분 앞에 이런 상황이 펼쳐지게 되면 여러분 어떤 마음이 드실 것 같나요?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완전히 미쳐버리지 않겠어요? 사랑하는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죠. 그나마 아버지에게 사랑 받고 누릴 것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형들에게는 미움 받는 삶이 쉬웠겠습니까. 형들이 미워하든지 말든지 그냥 아버지 사랑 받으니까 마냥 눈치 없이 좋아했겠냐고요. 열명의 형제들이 자기들끼리는 모여서 깔깔 거리고 즐겁게 노는데 자신은 그 사이에 끼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겠냐고요. 아닐 겁니다. 저는 요셉이 아무리 아버지에게 예쁨을 받았다고 해도 그 집안에서 엄청난 결핍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저희 아버지가 아버지 형제들 중에 막내시거든요. 큰아버지하고 저희 아버지하고 스무살 넘게 차이가 나셨단 말예요. 그러니까 큰아버지의 자녀들이 저희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도 있는 거예요. 그렇다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겠죠. 촌수가 있다보니 저의 촌수에 있는 형님들은 다 나이가 저희 아버지뻘인 겁니다. 그리고 제가 조카라고 부르는 조카들은 다 저보다 나이가 많은 거죠.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시골가는 것을 정말 싫어했습니다. 시골에 가면 친척들이 모이잖아요. 그런데 어린 당시에는 촌수 뭐 이런 것에 대한 개념을 잘 모르니까, 형님이라고 하라는데 아빠보다 나이 많은 분들한테 그 어린 제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사실 진짜 형님같은 형들은 저의 조카들인 겁니다. 그런데 그 조카들도 나이가 어릴 때였으니 자신들은 열여덟 살, 열아홉 살 막 이런데 초등학생한테 삼촌이라는 말이 나오겠냐고요. 그러니까 이 조카들도 저한테 그냥 동생 대하듯이 종민아 종민아 하는 거죠. 그런데 어른들이 보실 땐 그러면 안되는 거니까, "어디 삼촌한테 '종민아'라고 부르냐"고 혼을 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조카들 입장에선 저 어린애한테 삼촌이라고 부르자니 그것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종민아 라고 부르자니 혼나고 하니 굳이 저랑 붙어있질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는 항상 명절 때 할머니 집에 가면 혼자 있는 거예요. 조카들은 자기들끼리 나이대도 비슷하고 하니까 오랜만에 보면 반가워하면서 자기들끼리 막 수다떨고 놀러도 가고 그러면서 교류를 하는데 저는 누구랑 놀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저희 아버지보다 나이 많은 형님들과 뭐 무슨 대화를 하고 놀겠냐고요. 그래서 저는 설날이나 추석때가 되면 그 명절이 너무 싫었습니다. 놀 사람도 없고 할 것도 없으니 시간도 안가고, 차라리 그냥 혼자 있어서 혼자 있는거면 그나마 나을지 모르겠는데 다른 조카들끼리는 자기들끼리는 재밌게 놀고 그런 모습이 눈 앞에 보이니 그게 더 힘든 겁니다.

​ 요셉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요. 아무리 아버지로부터 예쁨을 받고 사랑을 받았어도 형제들 사이에서 왕따로 지내는 것이 어디 좋았겠냐는 거예요. 결핍이 있었을 겁니다. 자기도 형들하고 같이 어울려 놀고 싶었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켰을 때 형들하고 좀 어울려볼 생각에 들뜬 걸음으로 형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형들이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구덩이에 던져넣어요. 그러더니 다시 꺼냅니다. 그러더니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어른들에게 팔아 넘기는 거예요. 내가 입고 있던 가장 좋아했던 옷이 벗겨집니다.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알지도 못하는 나라로 끌려가는 거죠. 주변에는 노예로 팔려온 사람들이 같이 있습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시라고요. 그 상황이 얼마나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형들하고 좀 잘지내보려고, 자기도 좀 형들 사이에 껴보려고 그렇게 다가갔는데 돌아오는 것이라곤 나를 돈벌이 수단으로 보고 혈육관계에 있는 형이라는 사람들이 나를 팔아넘겼다고 할 때 그 상처가 어땠겠습니까. 어마어마한 상처가, 트라우마가, 결핍이 그를 휘감지 않았겠냐고요. 이런 절망적이고 상처가 남겨질 그 상황 속에서 오늘 마지막 절에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가 있는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누구에게 팔렸습니까?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린 겁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경호실장에게 팔린 거예요. 강대국의 왕의 경호실장의 집에 들어가게 됐다는 것입니다. 물론, 노예라는 신분이 그닥 유쾌한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는 결말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곳에서 요셉이 애굽 나라의 총리가 되는 그 시작점이 되는 거예요. 만약 요셉이 야곱의 집에 계속 있었다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냥 그러고 살았을 거예요. 아버지 품에서 편하게, 하지만 형들에게는 미움받는, 집안에서 왕따로 살아갔지 않았겠냐고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죽게 되면 그 이후의 삶은 어땠겠습니까? 형들하고 뭐 잘 지낼 수 있었겠어요? 서로 그냥 남처럼 지냈겠죠. 그러나 요셉은 비록 이 상처가 가득하고, 결핍이 가득하고, 트라우마가 생기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되었지만, 이 상황으로 인해서 훗날 애굽이라는 강대국의 총리로 세워지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너무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그 현실은 '꿈을 이루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는 거예요.

 요셉은 너무나 원망스러운 상황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원망하고 슬퍼하고 따지고 싶고 이해가 되지 않는 그 현실 앞에 놓이게 되었지만 나중에 요셉은 자신의 이 때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나중에 또 나누게 되겠지만, 대략 20년 뒤에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5장 7절과 8절인데요,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형님들을 구원하고 형님들과 형님들의 자손들이 살아 남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이 곳이 보내신 분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로의 고문관으로 삼으시고 또 그의 모든 권한을 나에게 맡겨 온 이집트를 다스리는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20년동안 칼을 갈아도 갈지 않았겠습니까? 이 형들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더 심한 고통을 줄까 그런 복수심을 키우지 않았겠냐고요.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보여주신 그 꿈을 이뤄나가시기 위해, 요셉을 성장시키시기 위해 주셨던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형들을 용서하고 형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그 결핍을 채우며 형들과의 관계, 결핍, 분노, 복수심 등 그 모든 것이 회복되고 치유되는 경험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꽃길을 걷고 싶어하고, 비단길을 걷고 싶어한다고요. 그러나, 그것은 나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려운 경험이, 때로는 감당못할 아픔이 나에게 굳은 살이 되어 나를 보호해주기도 하고, 더 큰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하는 능력을 기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놓여진 어려운 문제,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그 상황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그저 원망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그 모든 일들 앞에서, 너무나 힘든 시간들 속에서, 내 삶을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나눴다시피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통해 이뤄나가실 그 꿈을 꾸고 계시다고요.

​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내가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어떤 어려움과 아픔 가운데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축하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이뤄가실 그 꿈의 여정 가운데 서 계신 줄로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의 그 문제들, 그 어려움들은 여러분들을 성장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예비하신 훈련의 도구들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심을 반드시 기억하세요. 내가 이겨낼 수 없어도, 도저히 답이 안나올 것 같아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삶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꿈보다 더 크고 위대한 꿈을 꾸고 계시다는 겁니다.

 요셉이 20년 뒤에 20년 전부터 이어져온 그 모든 일들을 돌아볼 때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이루어가셨음을 바라보며 고백한 것과 같이, 저와 여러분들도 당장에는 내 앞에 펼쳐지는 어려운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때에, 나의 삶을 돌아보며 나와 함께 하신, 내 모든 삶의 시간들 속에 함께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의 고백이 나올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넘어지고, 흔들릴 때가 있을지라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안전할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을 함께 찬양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나아가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