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까 속에서도 형통한 사람

말씀본문 : 창세기 39장 11-23절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말씀제목 : 억까 속에서도 형통한 사람
오늘 말씀 제목이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겠는데, 요즘 이런 말들을 여기저기서 참 많이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날 억까하고 있어!"
'억까'라는 뜻을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이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시겠지만, '억지로 까내린다' 또는 '억지로 까다'라는 뜻을 가진 신조어입니다. 상대방을 특별한 이유없이 비난 및 비판 그리고 그 이유가 진짜 말이 안되는 억지일 때 쓰는 말이라고 하죠. 여기서 더 나아가서 하는 일마다 다 안되고 나쁜 일만 계속 생길 때 '세상이 날 억까하고 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진짜 세상이 억까하는 인물이 누구인가 대결을 해본다면 제 생각에는 요셉이 1등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성경 속 인물들이 거의 대부분 고난과 아픔을 겪긴 하는데 최고는 요셉인 것 같아요. 요셉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진짜 요셉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날 억까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얼마나 일어납니까. 지난주에도 말씀을 나눴는데, 요셉은 형제들 중에서 아버지가 제일 예뻐했던 아들이었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기도 했죠. 그리고 결국 형들의 그 미움으로 형들한테 죽을 뻔 했다가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었죠. 받아들이기 힘든 아픔이었다고요. 아버지의 심부름에 그저 순종하고 성실하게 임한 것 밖에 더 있었습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큰 내용들로 굵직하게 나눴다보니 그냥 요셉이 심부름 갔다가 형들한테 그렇게 당하는 내용들로 나누게 되었지만, 요셉이 형들을 찾아간 거리가 단순하게 이 동네에서 저 동네 간 거리가 아니었거든요.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형들을 찾아 간 경로를 보면 헤브론에서 세겜, 세겜에서 도단까지 갔단 말예요. 단순하게 이렇게 듣기만 하면 감이 안오시죠? 헤브론에서 세겜까지가 80키로, 세겜에서 도단까지가 21키로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감이 잘 안오실 것 같아서 제가 네이버 지도에서 우리 교회에서 80키로, 20키로를 각각 찍어봤더니, 아래쪽으로 가면 충청남도 천안, 세종시 가까이까지 내려가고, 옆으로 갔더니 강원도 횡성, 원주 이정도까지의 거리인 겁니다. 네이버에서 걸어서 24시간, 25시간이 걸리는 거리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하는 거죠. 심부름의 스케일이 어마어마 하죠? 단순하게 여러분 부모님이 '앞에 마트가서 콩나물 사와라, 아이스크림 사와라' 정도의 거리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요셉이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갔는데 형들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들에서 헤매고 있으니까 어떤 사람이 보고선 어디를 가는데 그렇게 방황하고 있냐고 물어봅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 사람한테 이러저러해서 내가 형들을 찾고 있는데 형들이 없는데 혹시 봤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그 사람이 "내가 듣기로는 도단으로 가자고 했던 것 같더라" 라고 대답을 해준단 말예요. 여러분같으면 어쩔 것 같으신가요? 도단까지 20키로입니다. 20키로면 저희 교회에서 수원종합운동장 정도 나오던데 걸어서 다섯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게다가 확실하지도 않습니다. 처음 본 사람이고 대충 듣기로는 이라는 그 정보 하나 있는 거예요. 거기까지 간다고 해서 형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정확한 근거도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가시겠어요? 저 같으면 안갈 것 같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그대로 얘기해도 되지 않겠냐고요. "아버지, 제가 세겜까지 가봤는데 형들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여기저기 엄청 헤맸는데 결국 못찾았고, 어떤 사람이 대충 듣기로는 도단으로 가자고 하는 걸 들었다는데 정보가 확실하지도 않고 해서 일단 돌아왔습니다." 라고 해도 됐지 않았겠냐는 겁니다. 요셉이 노력을 안한게 아닙니다. 80키로를 갔다고요. 그럼에도 요셉은 거기서 그냥 포기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시키신 심부름을 정확하게 완수하기 위해서 끝까지 형들을 찾아가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아요?
그렇게 힘들게 고생해서 형들을 찾았습니다. 얼마나 반갑고 좋았겠냐고요. 그런데 무슨 일을 당하게 됩니까? 그렇게 반갑게 형들에게 다가갔더니 형들이 갑자기 옷을 벗깁니다. 그러고는 구덩이 속에다가 집어 던지는 거예요. 나가지도 못할 구덩이 속에 던져져서 불안에 떨고 있는데 형들이 다시 올려줍니다. 그렇게 안심하려던 찰나에 형들이 나를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리는 거예요. 한순간에 노예의 신분으로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끌려가게 된 겁니다. 이게 뭐예요. 이게 뭐냐고요. 요셉이 잘못한 게 있다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서 열심히 형들을 찾은 것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한 거밖에 없다고요. 그런데 그 결과는 노예로 팔려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요셉은 이집트 왕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이라는 사람의 집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이미 먼 타국까지 온 상황에서 요셉이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죠. 현실이 막막하고 도저히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어찌저찌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창세기 39장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상황은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요셉에게 어떤 희망이 있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형통하다의 뜻이 뭡니까? 사전적 의미로 보면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지금 형통하다는 표현이 있을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형들한테 배신 당했죠. 편하게 살고 있던 좋은 집과 고향을 두고 알지도 못하는 다른 나라로 팔려왔죠. 가장 사랑받던 아들이었는데 노예의 신분이 되었죠. 도대체 뭐가 형통하냐고요. 뭐가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가는 게 있습니까? 상황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요셉이 원하는 뜻과 같이 잘되어 가는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을 보고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표현하고 있다고요.
여러분들은 이 표현이 와닿으십니까? 이게 남의 얘기니까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요셉이 형통했나보다 하고 보는 거지, 여러분들의 이야기라면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표현을 쓴다고 했을 때 이게 와닿겠냐고요. 지금 나 놀리냐 하고 화내지 않겠냐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친하다고 생각한 형들 혹은 언니들에게 갔는데 그 형들이 혹은 언니들이 완전 악질이라서 나를 조폭에게 팔아 넘겼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또 이 조폭들이 나를 중국에다가 팔아넘긴 겁니다. 그렇게 중국에 가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누가 '형통한 자'라고 표현하면 화나지 않겠어요? 모든 상황이, 모든 관계가, 모든 환경이 다 최악인 것 같은데 성경은 요셉을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표현을 하고 있다고요. 그렇게 표현하는 것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모든 상황이, 모든 환경이, 모든 관계가 다 망가지고 최악이어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이 하나만으로 성경은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하게 아무도 모르고 요셉만 아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의 주인이 볼 때에도 요셉이 '형통한 자'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축복과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 상황이 아무리 최악이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보여지고 느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학원에서, 가정에서, 친구들과의 어떤 모임에서 등등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면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 쟤는 교회를 다녀서 그런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빠른 나이에, 조금이라도 빠른 때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을 좇는 삶과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모습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 형통한 삶을 조금이라도 빨리 누렸으면 좋겠단 말예요. 진심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게 요셉은 주인의 인정을 받으면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 같습니다. 요셉의 성격 자체가 그랬던 것 같아요. 정직하고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형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던 거예요. 형들이 뭐 잘못한 것들이 있으면 그걸 아버지에게 그대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나쁘게 보면 고자질 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겠지만, 또 긍정적인 모습으로 보면 정직한 모습인 거 아니겠습니까. 아버지에게 속이거나 숨기지 않고 형들의 잘못된 것들을 그대로 얘기하는 거죠. 사실 이런 행동이 올바른 행동인 거 아니겠냐고요. 그러니까 요셉은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켰을 때도 꾀를 부리거나 대충하지 않고 그 먼 길을 끝까지 그렇게 형들을 찾아간 것을 보면 참 성실하고 정직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팔려온 이곳에서도 그 성실과 정직함이 인정을 받은 것이었겠죠. 39장 4절과 6절을 보면 알 수가 있는데요.
4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주인으로부터 완전히 신뢰를 얻은 것입니다. 이렇게 신뢰를 받으며 열심히 살아가던 요셉에게 어느날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은 이제 건장한 청년이 되었을 거 아닙니까. 호기심도 많고 혈기왕성한 그럴 때에 주인의 아내가 노골적으로 유혹을 하는 거예요. 요셉이 얼마나 매력적이었으면 노예의 신분인데도 그 주인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겠어요. 그런데 상상을 해보면 성경에서도 요셉의 외모를 아주 높게 평가한단 말이죠. 성경에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라고 표현할 정도이니 외모도 괜찮았겠고, 게다가 주인으로부터 완전히 신뢰를 받을 정도였으니 일도 얼마나 잘했겠어요. 그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꼬실 정도로 성실하고 똑똑하고 잘생기고 매력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유혹을 뿌리치는 거예요. 그 주인의 아내의 유혹이 한두 번 있던 것이 아닙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요셉이 얼마나 좋았으면 날마다 꼬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날 요셉이 평소와 같이 열심히 또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날따라 이 주인의 아내가 완전히 작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오늘은 꼭 꼬시겠다고 맘을 단단히 먹은 것 같아요. 그렇게 요셉을 붙잡고 적극적으로 꼬시는데도 요셉은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거죠. 이 주인의 아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요셉의 옷을 붙잡고 그랬는지 요셉이 아예 옷을 그냥 벗고 그 자리에서 피해버린 겁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그 유혹을 이겨냈단 말예요.
그런데, 그 결과로 어떻게 됩니까? 누명을 쓰고 감옥을 가게 됩니다. 이 주인의 아내가 자신이 꼬셔도 넘어오지 않으니까 너무 분하고 화가 났는지 사람들에게 요셉이 자신을 덮치려고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누명을 씌워버린 거죠. 주인이 자신의 아내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기껏 믿고 집안의 모든 일을 다 맡겼더니 자신의 아내를 덮치려고 했다는 것에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겠습니까. 그렇다고 요셉이 억울하다고 당신의 아내가 나를 꼬시려고 했다고 말한다고 한들 그 얘기를 주인이 믿겠냐고요. 그렇게 요셉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지금으로 생각하면 '성폭행범'이라는 너무 치욕스러운 죄명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 진짜 억까 아닙니까? 이정도는 돼야 '세상이 날 억까한다' 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요. 요셉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유혹에 안넘어간 것밖에 더 있냐고요. 너무 정직하고 성실했던 것밖에 더 있습니까. 요셉이 감옥에 갇히면서 진짜 별별 생각 다 들었을 것 같지 않으세요? '와 진짜 이거 뭐지?' 이러면서 원망도 나오고 화도 나고 그러지 않겠냐고요. 너무 억울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23절 끝부분을 보겠습니다.
23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형통하게 하셨더라" 여러분 이 구절이 이해가 되시냐고요. 아니 지금 노예로 팔려온 것도 억울하고 화가 날텐데, 그래도 어찌 저찌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단 말예요. 인정도 받고 어느정도 좀 살만해지니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됐습니다. 심지어 '성폭행범'이라는 너무 치욕스러운 죄명으로 전과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여러분 노예가 낫겠어요, 범죄자가 낫겠어요? 둘 다 별로긴 하지만 그래도 둘 중에서는 노예가 낫다고요. 범죄자보다는 노예가 나은 것 아니겠습니까. 노예로 팔려온 것만도 진짜 나락간 건데, 여기서 더 밑바닥으로 간 거잖아요. 성폭행 범죄자로 감옥살이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럽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 '형통하게 하셨다'는 표현을 듣는다면 여러분 어떨 것 같으신가요? 저는 진짜 하나님한테 막 따져 물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이게 무슨 형통입니까?!", "하나님 저 놀리시는 거예요?!" 이런 말이 나오지 않겠냐고요. 여러분 뭔가 좀 잘될만 하니까 무슨 안좋은 일이 생겨서 상황이 엄청 힘들어지고, 그래도 어찌저찌 잘 이겨내서 좀 살만해지니까 또 무슨 더 안좋은 일이 생겨서 이전보다 더 힘들어지면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형통하게 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겠냐고요.
내가 잘못해서 얻는 결과라면 그래도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팔려갈만한 행동을 해서, 혹은 내가 감옥에 갇힐만한 죄를 지어서 그랬다면 그래도 그나마 이해라도 되잖아요. 그런데 난 잘못한 것 없이 정말 남들에게 부끄럼없이 열심히 성실하게 정직하게 살았는데 이런 안좋은 일이 계속 될 때, 억울한 일이 생길 때 오히려 이게 더 힘든 거죠.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상황은 최악의 상황이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23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의 상황은 최악의 상황에 놓여있었지만 성경은 그를 형통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가 '형통한 자'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형들에게 배반 당했어도, 노예 신분이 되었어도, 억울하게 범죄자가 되었어도,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는 '형통한 자'로서 삶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통하다의 뜻이 뭐였다고 말씀드렸었죠?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가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단순하게 그저 앞에 펼쳐진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하나도 형통한 것이 아니고 그저 최악의 상황이라고밖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그런 현실을 '형통하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바로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바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같이 잘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통한 자'였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일들을 통해서 요셉을 애굽 나라의 총리로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요셉의 인생을 이끌어가고 계셨다는 거예요. 겉으로만 봤을 땐 세상이 억까하는 것 같은 삶의 모습이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봤을 땐 그것은 억까가 아니라 형통한 자의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는데요. 내가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어려운 일들을 마주했거나, 내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것 같은 상황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시다면 축하드린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꿈을 이루시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죠. 나는 분명히 누가봐도 열심히 했고, 누가봐도 성실하게 했고, 누가봐도 정직했는데도 불구하고 억울한 일이 생기고 계속해서 안좋은 일이 생기고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더 나빠지는 것 같기만 할 때,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사람들은 세상이 나를 억까하고 있다면서 주저앉고 원망하고 분노하고 슬픔으로 가득찰 수밖에 없는 것과 달리 우리는 기대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통해 나를 어떻게 형통한 자리로 이끌어 가실지 기대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 일들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시고, 인정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더 크고 위대한 일들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하여 나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의 현장 가운데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억까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억까 속에서도 형통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최악이어도, 환경이 아무리 나빠도, 관계가 아무리 망가졌어도, 그러한 상황과 환경과 관계 속에 있을지라도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면 반드시 그 삶은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형통한 자리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을 붙잡아보세요.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꿈을 꾸고 이뤄나가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여러분들의 그 삶을 절대 가만히 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뤄가시는 그 놀랍고 아름다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의 처음과 끝을 주관하시는 주님께 그 모든 삶을 맡김으로 하나님께서 펼치시는 너무나 멋지니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여러분들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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