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도사/설교기록

아깝지 않은 사랑 (누가복음 7장 36-50절)

하엘파파 2026. 3. 9.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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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깝지 않은 사랑

말씀본문 : 누가복음 7장 36-50절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말씀제목 : 아깝지 않은 사랑

 

 여러분들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초등학생 때 인기가 많았습니다. 맨날 여자애들이 편지 갖다 주고, 먹을 것 갖다 주고 막 그랬단 말예요. 발렌타인데이, 빼빼로데이 뭐 이런 날이면 책상에 뭐가 엄청 많이 쌓여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제 설교를 집중해서 들으신 분들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실 거예요. 제가 학창시절에 연애를 해본 적이 있다고 했어요, 없다고 했어요? 네, 학창시절에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단 말이죠. 그럼 이거 뭔가 좀 앞뒤가 안맞는 얘기 아닙니까? 제가 초등학생 때는 엄청 순수했던 거예요. 연애, 사귀는 거 뭐 이런 걸 아예 몰랐던 거죠. 그리고 이제 중학생 올라가면서 이성에 눈을 뜰 때쯤에 그 인기가 유지 됐다면 그래도 좀 연애를 해봤을지 모르겠는데, 하필 키가 안자라가지고 막상 중고등학생 때는 인기가 아예 없었던 겁니다. 안타까운 학창시절이죠.

 아무튼, 초등학생 때는 인기가 많았단 말예요. 5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방학에 여자애 두 명이 편지를 써서 집으로 보내줬는데, 제 기억으로는 짝꿍이었던 여자애하고 소꿉친구였던 여자애였던 거로 기억이 나요. 그런데 편지를 받고서도 제가 뭐 아무런 액션이 없으니까 엄마가 답장을 써서 보내주라는 겁니다. 저는 뭐, 귀찮기도 하고 뭐라고 써야될지도 모르겠는데 엄마가 그래도 답장을 보내줘야 한다고 계속 막 시키시니까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두 여자애한테 각각 답장을 썼어요. 그러고선 엄마한테 알아서 보내달라고 준 겁니다. 그리고 얼마후 개학을 해서 학교를 갔는데 짝꿍 여자애가 이러는 거예요. "편지가 바껴서 왔더라" 엄마가 편지와 편지봉투를 바꿔서 잘못 넣었던 겁니다. 최악이죠. 제가 당시에 얼마나 민망했었는지 집에 가서 엄마한테 막 투정을 부렸던 그런 기억이 나는데, 그 편지를 바꿔서 받은 여자애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냐고요. 얼마나 상처였겠습니까. 그 여자애들에게 있어서 저는 세상 제일 나쁜 남자였던 거죠.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하고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제가 그 두 명 중에 한 명에게라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런 행동이 나왔겠어요? 절대 그렇게 안했을 거라고요.

 가끔 보면 이런 질문들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은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은가' 각자의 취향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맘 고생을 안할 수 있는 거라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야 된다고 보통은 얘기를 해주긴 하는데, 사람 맘이 또 그렇게 맘대로 되는 게 아니죠.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사귀는데 이 사람은 나를 안좋아합니다. 데이트 하는 것도 귀찮아하고, 애정표현도 안하고, 메세지 답변도 한참 뒤에 오고 이러면 그 연애가 행복하겠어요? 너무 힘든 연애가 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나랑 만나고 싶어하고, 나와 있는 시간을 행복해 하고, 나와의 데이트 시간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애정표현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과 만나면 사랑받는 느낌을 충분히 받는 연애를 하게 되는 거잖아요.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안좋아하는지는 그 사람의 행동에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배에 나오는 발걸음이 어떠세요? 즐거우십니까, 귀찮으십니까?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는요? 찬양하는 시간이, 말씀 듣는 시간이, 예배하는 시간이 즐거우신가요, 지겨우신가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과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만 짝사랑하게 만들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는 거예요.

​ 저는 초등학생 때까지, 그러니까 주일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그냥 주일에 교회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스러우니까 그냥 그렇게 교회를 가고 예배를 드리고 했던 것 같은데, 중학교 2학년 때 하나님을 좀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을 했던 기억이 나거든요. 그 전에는 배워서 아는 하나님, 당연한 하나님으로 알고 예배도 그냥 주일이면 당연히 하는 것, 교회도 주일이면 당연히 가는 곳 정도로 알고 있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수련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겁니다. 그렇게 경험을 하고 나니까, 그 이후에는 예배가 너무 즐거운 거예요. 찬양하는 것이 너무 좋은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가요 듣던 것도 다 안듣고 찬양만 듣고 그랬거든요. 하나님을 체험해 보니까 모든 것이 너무 행복한 겁니다. 빨리 예배드리러 가고 싶은 거예요. 빨리 교회에 가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싶은 거죠. 이러한 은혜의 체험이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신앙생활은 단순한 믿음이 아닌 거예요.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게 진짜로 믿어지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믿음,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나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그 믿음이 생기면 예배시간이 지겨울 수가 없는 거예요. 아니 지겹기는 커녕, 빨리 예배를 드리고 싶은 겁니다. 예배 시간이 그저 너무 좋기만 한 거죠.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믿음의 사람들을 향해서 사람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새 술에 취했다'라고 얘기 하는 거예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거죠. 세상은 알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느낌인 겁니다. 이러한 감격이, 이러한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먼저, 한 사람은 바리새인인데요. 3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식사를 하자고 초대합니다. 굉장히 긴장된 장면이 아닐 수 없는 거예요. 왜냐면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웬 예수라는 젊은 청년이 나타나서는 자신들이 목숨처럼 지켜오던 삶의 방식을 막 지적하는 거예요. 가식적인 인간들이라면서 막 막말도 하고 그러는 거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청년이 어느날 나타나서는 목사님들을 향해서 "이 뱀같은 인간들아!", "이 썩어빠진 인간들아! 니들은 다 가짜다!" 이러면서 외치고 다니는 거죠. 목사님들이 이 청년을 좋아하겠어요, 싫어하겠어요. 당연히 싫어할 겁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마치 이런 관계에 있는 사이라고요. 그런데 어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초대를 한 것이죠. 굉장히 긴장감 넘치는 장면인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긴장감 넘치는 장면에 긴장을 더하게 하는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37절을 읽어볼게요.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 그 동네에서 죄를 지은 한 여자가 등장을 하는 겁니다. 여기서 이 죄 지은 여인은 신학자들과 성경학자들은 보통 창녀로 해석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죄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보통 도덕적 타락, 성적 타락을 얘기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로 볼 때 창녀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 장면은 많은 죄 없이 거룩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며 부정한 것에는 손도 안대는 바리새인과,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죄인이라고 수근거리는 여인, 그리고 그 사이에 예수님이 위치하고 있는 모습인 겁니다.

 부정한 것에는 손도 대지 않고 쳐다도 안보고 같이 있는 것조차 싫어하는 바리새인의 집에 이 죄 지은 여자가 어떻게 들어왔을까요? 아마도, 일반적으로는 못들어왔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목사님들이 막 모여있는 자리에 어떤 술집 여자가 있는 모습, 어떠세요? 상상이 안되지 않습니까? 그 술집 여자 입장에서도, 목사님들이 그렇게 모여있는 자리에 있고 싶겠어요? 있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냐고요.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고 그냥 예수님께로 뛰쳐온 거예요. 그러고선 뭘합니까? 38절입니다.​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자신이 아끼는 옥합을 가지고 와서는 예수님 뒤에서 울면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향유를 붓는 거예요. 여기에서 향유 담은 옥합은 오늘날로 따지면 1년치 임금, 그러니까 연봉에 해당하는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물건인 겁니다. 기본적으로 몇천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당시의 여자들은 이것을 결혼지참금이나 장례비용 정도로 쓰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그동안 적금을 부으며 모았던 목돈을 깬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드린 겁니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 드렸다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진짜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동시에 그동안 내가 좇고 있던 가짜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금을 발견했는데 어떻게 가짜 금을 갖겠다고 가짜 금을 좇겠냐는 거예요. 진짜 돈을 발견했는데 그 어느 누가 위조지폐를 갖겠다고 하겠냐는 겁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발견한 거죠.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자신이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아껴두었던 향유 옥합이 아깝지가 않은 겁니다. 예수님께 이것을 드리는 게 하나도 아깝지 않은 거죠. 이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의 마음이 어땠는지 39절을 보겠습니다.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바리새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혀를 차는 거예요. 쯧쯧 거리고 있는 겁니다. 왜요? 죄인을 못 알아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하도 여기 저기서 유명세를 떨치고 메시아니 어쩌느니 하니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한번 보고 싶었언 것 같아요. 그래서 식사를 좀 하면서 긴가민가 좀 살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좀 보려고 했더니 웬 걸? 죄인도 못 알아보는 거죠. 아마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이 자신들에게 이러한 행동을 했다면 발을 잽싸게 피하면서 욕했을 겁니다. 왜냐면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바리새인들은 부정한 것들과는 아예 상종 자체를 안했기 때문에 죄 지은 여인이 자신의 발을 닦는다? 이건 테러를 당한 수준인 거예요. 집에 가서 발을 벅벅 몇 번을 닦았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선지자라고도 불리우고, 메시아라고도 불리우는 사람이 모두가 다 알고있는 죄 지은 여자조차도 못알아 본다는 것에 실망을 한 것이죠. 역시 소문은 거품이었구나 생각을 했을 거예요. 바리새인의 그러한 마음을 알아차리신 예수님은 그에게 50데나리온과 500데나리온 빚진 자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한 사람은 500만원의 빚을,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5000만원의 빚을 진 것이죠. 그런데 두 사람 모두에게 빚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감동을 하고 감사할 수 있겠냐는 거예요. 그러자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말하는 것입니다. 5000만원 탕감받은 사람일 거라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빚을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당연히 더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시몬에게 말씀하시는 거죠. 너는 나를 초대해 놓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맞춤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사회에서의 예절이었습니다. 손님을 초대하고 발을 씻겨주는 것은 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입맞춤으로 인사한다는 것은 친근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악수나 포옹 같은 것이죠. 그리고 감람유를 붓는다는 것은 손님의 지위와 명예를 높여주는 행위로 좋은 향기와 함께 편안함을 주는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이러한 행동들을 하지 않은 거예요. 왜 식사에 초대해 놓고선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을 진정한 손님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존경심이나 사랑의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너 어떤 인간인가 한번 봐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거죠.

 그러나 그에 반해 여인의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발씻을 물이 없으니까 자신의 눈물로 그 발을 씻기고, 수건이 없으니까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씻겨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의 가장 값진 향유를 깨서 예수님께 부어 드린 겁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께 나아가는 여인의 발걸음은 용기가 아니라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기에, 부끄러움조차도 그 발걸음을 막지 못했던 것이죠.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드릴만큼 예수님을 환대하고 예수님을 위한 마음을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죄만을 용서하러 오셨을까요? 아닙니다. 이 바리새인들의 죄도 용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런데 한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이 빚진 자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어마어마한 죄에 대한 빚을 탕감 받고서도 예수님께 감사한 마음이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여인은 알고 있던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없애주셨다는 것을 알았다는 거예요. 그 은혜를 아니까 예수님께 그저 감사한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중요시 여긴 것조차 아깝지 않을 정도로 예수님께 부어드리는 거죠.

 5000만원을 탕감 받았는데 5만원 쓰는 것이 아깝겠어요? 5억원 빚을 면제 해줬는데 면제 해준 사람에게 50만원 쓰는 것이 아깝겠냐고요. 50억 빚을 면제 받았는데 500만원 쓰는 것이 아깝겠냐는 겁니다. 지금 이 여인은 예수님의 은혜의 값어치를 느낀 거예요. 그러니 자신이 평생을 아끼며 모아온 몇 천만원짜리 향유 옥합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인의 모습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50절입니다.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내 죄악된 모습조차도 사랑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지었던 나의 죄악된 모습이 있을지라도 사랑의 예수님께서는 받아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과 같이 나를 더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나의 정성을 예수님께서는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내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여인은 그 믿음으로 평안을 누리게 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바리새인의 모습을 하고 계신가요, 죄 지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계신가요. 서두에 질문드린 질문을 다시 드려봅니다. 여러분은 예배 드리러 나오는 발걸음이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예배드리는 시간이 기쁨이 되십니까, 지루하게 느껴지십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아야 내가 드리는 예배에 기쁨이 있을 수가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아야 이 예배의 소중함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에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함을 주신다는 거예요.​

 바리새인이 50데나리온의 빚밖에 없어서 예수님을 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고 대단한 것인지를 모르니까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거예요. 50데나리온이든, 500데나리온이든 모두가 다 은혜로 탕감받은 자라는 거죠. 저와 여러분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인지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 아까울 것이 없는 겁니다. 내 인생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 나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내어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셨습니다. 아깝지 않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거죠. 그 은혜와 사랑의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아깝지 않은 사랑을 주신 주님께 아깝지 않은 사랑을 내어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감사로 예배드리세요. 감사로 하루를 살아가 보십시오. 은혜 위에 은혜가, 감사 위에 감사가 더해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시고,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내 삶을 내어드리며, 기쁨이 넘치는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즐거움과 기대가 넘치는 믿음생활을 해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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