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위로

말씀본문 : 누가복음 7장 11-17절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말씀제목 : 최고의 위로
MBTI라는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성격테스트라고 해서 그 사람의 성격을 어느정도는 파악할 수 있는 지표같은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테스트 같은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 거든요. 예전에 제가 여러분들 나이 때에는 혈액형, 또는 별자리, 심리테스트 같은 것들로 그 사람의 성격을 짐작해 보거나 유추해 보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MBTI라는 것이 그나마 제일 과학적이고 신뢰할만한 테스트로 인정 받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MBTI를 알아보고 그것이 곧 자기 소개가 되기도 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처음 만나게 되면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되고, 그렇게 알게 된 MBTI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에 대해서 어느정도 유추해 보고는 하는 거죠. 아마 대부분 다 MBTI에 대해서 알고 계시겠지만 짧게 알아 본다면, E와 I는 뭐예요? 외향형인지 내향형인지를 말하는 것이죠. 그 다음 S와 N은 뭡니까? 현실적인지, 미래지향적인지를 말하는 것이고, T와 F는 뭐예요? 논리, 사실 중심적인지 감정 중심적인지, 그리고 J와 P는 뭡니까? 계획적인지, 즉흥적인지에 대한 성향을 알 수 있는 거예요.
자 그럼 여기서 잠깐, 전도사님의 MBTI는 무엇일지 맞춰보겠습니다. 먼저 E와 I 중 뭐일 것 같으세요? 네, 저는 E입니다. 외향적인 편이죠. 그 다음, 현실적일 것 같으세요, 미래지향적일 것 같으세요? 네, 미래지향적, N입니다. 저는 당장의 일처리 보다는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중에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성격이에요. 그 다음에, 사실중심적일 것 같은가요, 감정 중심적일 것 같은가요? 의외로 저는 F입니다. 감정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에요. 마지막으로 계획적일 것 같으세요, 즉흥적일 것 같으세요? 네, 굉장히 계획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디 여행을 가거나 하면 미리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 어떤 걸 먹을지를 다 정하고, 그것에 맞게 시간을 짜고, 그것에 맞게 경로를 짜서 시간표를 쫙 만들 거든요.
여러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그냥 설교하는 것처럼 보이시겠지만, 지금 이 내용이 나올 때쯤이면 몇 분 정도가 지나가 있어야 하는지를 다 계획을 해요. 그래서 제가 앞에서 설교를 시작하면 동시에 휴대폰에 있는 타이머도 같이 시작을 누릅니다. 시간을 다 체크하면서 조절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굉장히 피곤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계획 짜는 것을 싫어하는 누군가들에게는 오히려 또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성격인 거죠.
아무튼 이렇게 조합을 하면 ENFJ가 나옵니다. MBTI에서 이 성향을 얘기할 때 '선도자'라고 해서 다른 사람과 주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올바른 일을 하려고 하는 성향이라고 나오더라고요. 여러분들이 저를 볼 때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꽤나 맞는 것 같습니다.
이 MBTI라는 것이 재밌는 이유가, 똑같은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성격에 따라 다 다른 반응을 나타낸다는 거예요. 많이들 알고 있는 내용이죠. "나 우울해서 빵 샀어"라고 누군가가 얘기를 하면 F성향은 어떻게 반응해요? "뭐야, 왜 우울해? 무슨 일 있었어?" 이런식으로 반응하는가 하면, T성향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무슨 빵 샀어?" 이렇게 반응한다는 거예요.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라는 말에 F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맞아 맞아, 혼자 슬퍼하는 것 보단 나눠야지. 혼자 슬퍼하지마' 이런 마음이라면, T는 어떤 생각을 해요?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둘로 늘어날 뿐' 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같은 상황 속에서도 T성향과 F성향의 생각의 차이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뭐 물론, 무조건 적이지는 않겠습니다만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 이렇게 반응이 서로 다르다는 거죠. 그래서 T 성향인 사람에게 F 성향의 사람이 F 성향대로 위로를 하면 오히려 T 성향인 사람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더 화를 나게 하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F 성향의 사람에게 T 성향의 사람이 T 성향대로 위로를 하면 F 성향은 오히려 더 상처를 받게 되는 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MBTI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은 것이지만 제가 함부로 예상을 좀 해본다면 제가 생각할 때는 EISNTFJP일 것 같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50대 50으로 딱 나올 것 같은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엄청 외향적이셨다가도 어떤 때는 혼자서 있는 시간을 자주 갖기도 하셨고, 또 어떤 때는 지극히 현실적이었다가도 어떤 때는 미래지향적으로 말씀을 하기도 하셨잖아요. 또 어떤 때는 완전 논리로 있는 사실 그대로 뼈를 때리실 때도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그 누구보다도 감정적인 터치를 하셨던 분이 예수님이란 말이죠. 완전 계획적으로 누군가에게 접근을 하시거나 어떤 일을 하실 때도 있는가 하면, 완전 당황스럽게 갑자기 즉흥적으로 어떤 일들을 벌이기도 하셨잖아요. 그런 것을 보면 예수님은 특별히 어떤 성향에 딱 치우쳐있기 보다는 정말 모든 성향이 완벽하게 반으로 딱 맞아떨어지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나 그냥 생각해 보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성에 가게 됩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광명이라는 곳에, 시흥이라는 곳에 가신 거예요. 그렇게 나인 성의 성문에 가까이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줄을 지어서 나오고 있는 겁니다. 어떤 행렬이었어요? 장례행렬이었던 거예요. 그 행렬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땠겠습니까? 다들 슬픈 얼굴이었겠죠.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큰 슬픔에 빠지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니까 누가 죽은 것이었어요? 어떤 젊은 청년이 죽은 거예요. 성경에서 정확하게 몇살 정도인지 나오지는 않지만,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까지를 말하는 헬라어 '네아니스코스(neaniskos)'라는 단어가 쓰인 것을 볼 때 한창 젊은 나이의 남자 청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죠.
죽음이라는 것은 물론 모두에게 슬프고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이지만, 나이가 어려지면 어려질 수록 안타까움의 무게가 더해지잖아요. 더군다나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 정도면 얼마나 한창 때입니까. 너무나 찬란할 때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찬란할 때에 죽게 되었으니 그 주변의 사람들이 얼마나 안타까웠겠냐는 겁니다. 그런데 하필 또 엄마는 과부였어요. 과부가 무엇입니까? 남편이 없는 여인을 과부라고 합니다. 이 엄마에게 있어서 아들은 희망과도 같은 존재인 거예요.
요즘에야 여자들도 많이 사회활동을 하고, 능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남자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잘 살 수 있는 사회지만, 예전에, 특히 이 예수님이 활동하던 1세기 당시의 유대사회에서는 여자들이 사회에서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조선시대를 생각해 보면 어때요? 남자들이 대외활동을 하고 여자들은 다 집안에서 집안 일만 하는 그런 모습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이 유대사회도 여자들은 어떤 대외활동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당시에 과부가 되는 것은 삶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외부활동을 해서 돈을 벌어올 수 있는 남편이 없으면 그 삶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도 이제 아들이 장성해서 외부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면, 아들이 일을 해서 엄마를 먹여살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아들 마저 죽었으니 이 엄마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절망적인 현실 그 자체인 겁니다. 그러니, 이 장례행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땠겠어요. 젊은 청년의 친구들은 젊은 나이에 죽게 된 친구의 시신을 운반하며 비통한 심정 가운데 있었을 것이고, 그 젊은 나이의 아들을 잃게 된 과부의 지인들은 남편도 잃고 아들도 잃게 된 이 과부의 삶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이 장례행렬에는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저 절망과 슬픔만이 가득한 행렬의 모습이었다는 거예요. 그런 절망이 가득한 행렬을 예수님께서 보게 되신 겁니다. 그런데 역시 우리 사랑의 예수님은 그 모습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는 거죠. 그 행렬 속으로 들어가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절망 가운데 있는 과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과부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울지 말아라" 여러분, 이 과부가 이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요. 아니 어쩌면, 그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라서 주변 사람들이 차마 이 과부에게 울지말라는 말조차 도저히 못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쵸. 그 어느 누가 감히 그 마음을 상상이나 해볼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이, 그 어떤 말이 아들을 잃은 엄마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은 아직 장례식장에 대한 경험이 없을 겁니다. 어떤 분들은 경험해 보신 분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거의 없을 거예요. 저도 뭐 많은 장례식을 경험해 보진 않았지만, 참 어려운 것이 이 장례식장인 것 같습니다. 결혼식이나 돌잔치 이런 것들은 가서 웃으면서 축하해 주면 되잖아요. 잔치집은 은무슨 말을 해도 그저 즐겁고 편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런데 장례식장은 아니잖습니까. 무슨 말을 해도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까 장례식장에 들어서서 상주를 마주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는 거예요. 사랑하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떠나보낸 그 사람에게 그 어떤 말이 위로가 되겠냐고요. 그 심정을 감히 상상도 못하겠다 보니 차마, 감히 어떤 말도 못하겠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울고 있는 그 사람에게 "울지마"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절망감에 휩싸여있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수없이 들었을,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꺼내지도 못했을 그 말, "울지 말아라" 예수님의 울지 말라는 말은 단순하게 그만 울라는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울지 말라는 말은 너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원인을 내가 해결해 주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는 거예요.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단순한 위로의 형식적인 말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존재의 의지가 담겨 있는 구원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고선 관에다가 손을 대시는 거예요. 그리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청년아,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다 무슨 생각을 했겠어요? 이 청년의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저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지 않았겠습니까? 안그래도 슬픔에 휩싸여있는데 웬 미친 인간이 와서 미친짓을 하고 있는 건가 싶지 않았겠어요? 시체에게 일어나라고 해서 일어나지겠냐고요.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입니다. 이성적으로 말이 안되는 행동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15절을 보겠습니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죽었던 청년이 일어난 거예요. 말도 하는 겁니다. 죽었던 청년이 관속에서 나와서 뭐라고 했을 것 같으세요? 성경에 뭐라고 말했는지 나오진 않지만 상상해 보면 이러지 않았겠어요? "뭐야, 무슨 일이야? 어? 엄마..?! 이분은 누구..?" 이러면서 어리둥절 했겠죠?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장례행렬에 있던 사람들은 어땠겠어요?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가지고 깜짝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이 청년의 엄마, 이 과부는 어떤 모습이었을 것 같으세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들을 잃은 슬픔에 하염없이 울던 눈물이, 이제는 다시 살아난 아들로 인해 기쁨으로 벅차오르는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지 않았겠어요? 절망이 감격으로 바뀌는 겁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거예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인간의 상식과 이성과 생각에 맞지 않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에는 인간의 상식과 이성과 생각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불치병에 걸렸다고 해볼게요. 아무데서도 고칠 수 없답니다. 그런데 부산 어디에 가면 무조건 고칠 수 있대요. 안가겠습니까? 일본 어디에 가면 무조건 고칠 수 있대요. 안가겠어요? 미국 어디에 가면 무조건 고칠 수 있답니다. 안갈 거예요? 아니, 100%가 아니라고 해도 어느정도의 희망이 있다고만 해도 그 몇퍼센트의 희망이라도 잡아보기 위해 내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내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어떤 것으로도 이 현실을 이겨낼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나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냥 포기할까요? 그냥 주저앉으면 될까요? 그냥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절망 가운데 있으면 되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희망이 있는 존재들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어떤 소망과 어떤 희망이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예수님께서 내 모든 문제를 아신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할 때가 있어요. 이 절망 속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이러한 아픔의 일들을, 이러한 절망의 현실을 마주한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성적의 문제로, 부모님과의 갈등의 문제로, 친구들과의 관계의 문제로, 건강의 문제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떤 여러가지 상황에 대한 문제로 아픔과 상처의 일들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별다른 문제 없이 평탄하게, 평범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와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어요.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의 모습이 다를 뿐이지, 그 누구도 아무런 문제없이 그저 평탄하고 평화롭게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왜 이렇게까지 제가 확답을 할 수 있냐면,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무리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시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녀들이죠.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 붙잡아 봐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생명까지도 살려내시는 우리 주님께서 그 어떤 것인들 못하실 것이 있겠냐는 겁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으십시오. 절망 가운데, 슬픔 가운데, 아픔 가운데, 상처 가운데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길 소망합니다.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예수님의 이 음성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에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능력으로 너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의지의 선포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위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위로, 진짜 위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에요.
"청년아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향해 "문제야 떠나가라", "아픔아 물러가라", "절망아 소망으로 바뀌어라" 라고 명령하실 때에, 주님의 선포대로, 주님의 말씀대로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나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기쁨과 감격으로 바꾸시고, 최고의 위로로 나를 안아주시는 주님을 만남으로 남은 삶의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쁨으로 감사하며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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