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웨슬리신학

의인과 신생

하엘파파 2024. 11. 2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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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과 신생

 

1. 구원의 순서

 웨슬리 신학에 있어 구원론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신학은 전도와 설교의 현장에서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설교의 강조점이 성결에 있었듯이 그의 구원론이 성결론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웨슬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즉, 일반적으로는 현재의 구원과 궁극적인 구원을 포함하여 이를 본연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고 불렀다. 이 구원은 그 시작이 있고, 계속 되며 그 마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의 구원은 선행적 은총(preventing grace)으로부터 시작하여 영화의 사건으로 종결된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의 역사는 깨우치고 책망하는 은총(convincing grace)으로 이어진다. 이 은총의 역사가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믿음은 은총에서 나온다. 이것이 구원에로의 첫 단계이다.

 곧 웨슬리는 구원을 위한 은혜의 역사를 시간상에서 볼 때에 이는 선행적 은혜에서 깨우치는 은혜(Convincing Grace)로, 그리고 의롭게 하는 은혜(Justifying Grace)로, 또 성결케 하는 은혜(Sanctifying Grace), 그 다음에는 영화롭게 하는 은혜(Glorifying Grace)로 연속되면서 역사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계속적이고 연속적으로 보는 것이 웨슬리의 특징이다.

 사람은 의롭다함을 받으며 거듭난다. 또 성화되고 성장한다. 그리고 영화롭게 된다. 그러나 이 구원의 시작과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홀로 역사하신다. 곧 선행적 은총과 영화롭게 하는 은혜는 사람의 호응의 여지없이 하나님이 홀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 점으로 보아, 웨슬리는 구원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과 그 출발점을 같이하고 있다.

 죄는 어떤 종류의 죄이든 간에 모두 그 자체가 객관적인 결과와 주관적인 결과를 지니고 있다. 죄의 부패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세력이다. 인간은 이 죄책에서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 부패성으로부터 씻음을 받아야 한다. 이런 죄의 성격에서 구원론을 설명하게 될 때, 죄책에서의 용서받는 면을 설명하는 것을 의인이라고 하며, 부패성에서 씻김받는 면을 성화라고 말한다. 웨슬리는 이 의인과 성화를 현재적 구원이라고 불렀다.

 원죄로 인한 죄책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선행적 은총,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무조건적인 공로로 해결된다. 그러므로 선행적 은총 아래 있는 실존적인 인간은 원죄의 부패성만을 지니고 있다. 이 부패성 때문에 이 실존적 인간은 자범죄를 짓게 된다.

 여기에 자범죄로 인한 죄책은 의인에서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누적된 죄의 부패성은 성화의 과정에서 씻김을 받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웨슬리는 이 성화과 신생의 사건으로 부터 시작되어 성화의 과정에서 온전한 성화에 이르며, 그 후도 성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영화로 완결된다고 보았다.

 이 영화의 사건에서는 죄로 인한 모든 흔적 곧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제약성과 허약성에서도 해방을 받는다고 본 것이다. 

 

2. 의인

 의인은 영어의 justification의 번역으로서 이를 칭의, 또는 선의로 번역하기도 한다. 의인은 곧 죄책에서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의인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서 죄인이 실제로 의로워지는 일로 신생과는 구분된다. 

 의인의 은혜를 받기 위한 조건은 '회개하고 믿는 것'이다. 이 회개에는 두 가지 종류 또는 단계가 있다. 첫째는 율법적인 회개요, 두번째는 복음적인 회개이다. 전자는 그저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고, 후자는 깨달은 나머지 모든 죄에서 거룩한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웨슬리는 사람이 복음을 믿기 전에 회개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곧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기 전에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 자기 의에 대한 의뢰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와 같이 믿음에 선행하는 것으로 회개를 강조한다는 점에 있어서 웨슬리는 칼빈과 대조적이며, 보다 실존적인 경향이 있겠다고 보겠다.

 

3. 신생과 그의 동시사건

 이 의인의 사건에 동반되는 사건으로 웨슬리는 신생과 양자(adoption)를 말한다. 이 사건들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 한 사건의 다른 측면들을 말하는 것이다.

 순서가 있다면 논리적인 순서에 있어 의인이 신생에 앞설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사람을 의롭게 하시며, 동시에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서 행하시는 일을 신생의 교리에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의인이 상대적인 변화를 의미한다면, 신생은 실제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의인은 하나님을 향한 외적 관계에서 지금까지 원수의 관계였던 것을 올바른 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신생은 인간의 속 사람이 변하여 죄인이 성도가 되는 것이다. 의인이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로 회복시키는 것이라면, 신생은 하나님의 형ㅅ아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 둘은 시간적으로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나, 그 성격에서 구분된다.

 이 신생을 때로는 중생이라고 부른다. 또 이 신생은 성화의 과정에서 볼 때는 성화의 시작이다.

 위의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관찰할 때 양자가 되는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곧 사람이 죄에서 용서함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용납을 받았으니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져 하나님의 상속자 곧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상속자가 된 것이다.

 

4. 신생의 표적

 신생의 표적으로서 웨슬리는 그의 설교 '신생의 표적(The Marks of New Birth)'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들고 있다. 이들은 신자에게 항상 있을 것이다.

 이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는 힘과 평안이다. 이 힘은 죄를 이기는 힘, 곧 범죄치 않게 하는 힘이다. 평안은 하나님의 자비와 의가 나타나심으로 오는 평안이다.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심에서 오는 결과이다. 곧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확신이다. 이 소망에서 솟아나오는 열매, 곧 결과는 확신이다. 이 확신은 믿음의 확신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 그리고 장래에 대한 영광의 소망이다.

 신생의 표적의 마지막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생에 대한 새로운 도익를 준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성도는 이 사랑으로 인해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준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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